종종 카와니시와의 기억들을 더듬곤 한다. 서로를 안 세월은 10년을 훌쩍 넘기지만 사귀게 된지 햇수로 2년이었다. 그 사이의 공백은 어쩔 수 없이 메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안타까워하는 대신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카와니시와의 기억을 더듬는 습관을 들였다.

 

  처음 만났던 날, 장소는 말할 것도 없이 고교시절의 체육관이었다. 운동화 바닥과 체육관 바닥이 마찰하는 소리가 울리는 그 속에서 카와니시는 신입부원 대열 속에서 비쭉 튀어나와 큰 키를 자랑하고 서있었다. 이미 입학했을 때부터 내 키를 훌쩍 넘기고 있었지만 갓 중학교를 졸업해 아직은 어딘가 앳된 인상을 가지고 있던, 뚱한 얼굴의 카와니시. 남들보다 색소가 한참 옅은 카와니시의 머리카락을 스치던 햇살을 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이 모든 건 그날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레귤러 자리를 후배에게 내주어야 했던 날. 머지않은 일이라는 걸 스스로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마지막으로 부실 정리를 하고 기숙사로 올라가는 어두운 길목을 걸으며 의외로 담담한 스스로에게 도리어 놀라고 있던 차였다. 가로등이 살짝 빗겨난 곳에서 불쑥 튀어나와 내 손을 붙잡는 손이 있었다. 기다랗고 뜨거운 카와니시의 손. 너무 놀란 나머지 순간적으로 아무 소리도 못 내고 눈만 둥그렇게 뜨고 있는데, 별안간 카와니시의 조금 잠긴 목소리에게 "세미 선배."라고 불리자마자, 눈물이 터졌었다. 카와니시는 기다랗고 뜨거운 손으로 날 끌어안고 가볍게 등을 토닥였다. 그랬던 널, 특별하게 생각하게 되는 건 역시 당연한 수순이었다.

 

  내가 졸업하던 날. 그날은 전날부터 심한 감기에 걸려 제정신이 아니었는데도 나는 부모님의 손을 만류하고 마지막으로 교복을 입었다. 열 때문에 잔뜩 흐려진 시선으로 겨우 졸업식을 마치긴 했는데 문제는 배구부 후배들이 준비해준 졸업 축하 파티였다. 사실 아픈 몸을 억지로 이끌고 졸업식까지 온 내 목적은 졸업식보다는 그 축하 파티였으니 문제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어쨌든 정문을 나서면서부터 한껏 신이 난 배구부 부원들의 대열의 맨 뒤에서 누가 봐도 벌겋게 열에 달아오른 내가 느리게 걷고 있자 옆에서 보폭을 맞춰 걷던 카와니시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선배, 데려다줄게요."라고 말하곤 그대로 대열을 이탈해 집 앞까지 배웅했다. 왠지 모를 억울함과 열이 올라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이성 탓에 대문 앞에서 나는 엉엉 울었다. 레귤러 자리를 내줬던 날은 차라리 양반이었다. 그날은 정말, 목 놓아 엉엉 울었으니까카와니시는 답지 않게 조금 당황했었다. 목 놓아 울면서 나는 중간, 중간 소리쳤었던 것도 같다. 잘은 기억 안 나지만, 내용은 대충", 오늘이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는데. 날 왜 데려다줘, 네가 뭔데! 내 맘을 알긴 해? 모를 리가 없지, 비겁한 새끼." 뭐 이런 정도였다. 카와니시는 울분을 토하는 나를 보며 단 한마디의 대꾸도 없이 그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도 곧 입술을 깨물었다. 울음을 삼키고서야 꼭 잡고 있던 카와니시의 옷깃을 겨우 놓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정말 그날이 마지막인 줄 알았는데.

 


  보통은 여기까지 회상하고 나면 재미있기도 하고, 쪽팔리기도 하고 복잡한 심경이 된다. 하지만 내가 네게 이별을 고한 이상 이제는 다른 의미로 다시 복잡한 심경이 되고 만다. 이런 널, 이다지도 내가 사랑한 널, 내가 정말.......






어깨 너머의 불행을 위해서

카와세미 : 카와니시 타이치, 세미 에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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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잠들었다. 문득 잠에서 깨 눈을 깜빡였다. 아직 채 잠이 다 깨지 않아 제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머리를 굴려보려 애썼다. , 그러니까

 

  카와니시에게 헤어지자고 말했고, 격앙된 상태로 말싸움을 조금 하다가... 가게에서 나와서 차에 올라탔는데 카와니시가 날 운전석에서 빼내 억지로 조수석으로 다시 밀어 넣더니 자기가 운전대를 잡았고, 전혀 낯선 길로 들어서는 걸 눈치 챘지만 어디로 가냐고 물어보기엔 어쩐지 자존심이 상해서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결국 고속도로까지 진입하고 점점 올라가는 속도에 조금 겁을 먹었는데.......

 

  익숙한 자리와 자동차 방향제 냄새, 적당히 틀어놓은 히터와 등과 엉덩이를 따뜻하게 해주는 열선 시트, 뒷자리의 창문을 미세하게 열어 답답하지 않게 하는 카와니시의 운전 습관. 그 익숙함에 나도 모르게 어느새 잠이 든 건가? 제정신이 아니네, 세미 에이타. 스스로의 안일함에 개탄하며 마른세수를 하자,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카와니시가 힐끔, 힐끔 내 쪽을 보고 있었다.

 

  "앞이나 봐."

  "."

  "앞에 보라니까? 사고 나겠어."

 

  힐끔거리는 시선을 못 견디겠어서, 결국 한마디 하자 카와니시는 눈썹을 찡그렸다. 맘에 안 든다고 시위할 때 하는 얼굴이었다. 부러 더 차가운 투로 말하자 카와니시의 눈썹은 더 찡그려졌다. 몇 년이 지나도 카와니시에게 남아있는 아이 같은 모습을 나는 사랑했다.

 

  "콱 사고라도 났으면 좋겠는데요."

 

  잠깐 입을 다물었다 한다는 말이 가관이었다. 씨발, 아이 같은 모습을 사랑한다는 말은 취소다.

 

  "당연히 농담이니까 얼굴 좀 펴요."

  "너 미쳤어?"

  "음. 차라리 미치고 싶긴 해요."

  "제발 운전에나 집중."

 

  카와니시는 제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서야 번듯하게 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받아칠 말이 없어 대화를 끊어버리고 창밖을 응시했다. 차창으로 운전하는 카와니시의 옆모습을 훔쳐보았고 이따금 내 쪽을 향하는 카와니시의 목마른 시선을 끊이지 않았다. 서로를 훔쳐보고. 나는 언젠가의 그날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은 정말 끝이지 않을까 다시 예상해본다. 갓 오전 0시를 지나는 새벽이었다.




*   *   *




  문득 뺨에 닿는 햇빛이 뜨겁다는 생각이 들자, 퍼뜩 눈을 떴다. 맙소사, 또 잠든 건가. 얼른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자 낯선 방안이었다. 커다란 창으로 햇빛이 가득 들어차는 . 어렵지 않게 호텔이나 모텔 쯤 되는 숙박업소일 것을 눈치 채고 몸을 일으키려 하자, 가슴팍에 올라와있던 타인의 팔이 내 몸을 지그시 눌렀다. 낯선 풍경 속에 단 하나 익숙한, 카와니시의 팔이었다.

 

  괜한 고집을 부리지 않고 순순히 몸을 다시 누이자, 카와니시의 팔이 이번에는 나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나란히 배구를 하던 때보다 더 공 들여 키운 카와니시의 근육은 이길 수 없었다. 아침잠이 많은 카와니시는 좀처럼 눈을 뜰 줄 몰랐다. 카와니시의 팔을 억지로 물리고 일어날 수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들어 카와니시의 얼굴을 살펴보니 밤새 운전을 한 탓인지, 지난 밤 이별선언 탓인지 반듯한 얼굴에 피로가 껴 조금 수척해보였다. 나는 카와니시의 품으로 다시 고개를 숙이며,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카와니시의 가슴팍에 얼굴을 푹 묻었다. 타이치, 나 힘들어.

 


  첫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나는 정말 통감했다. 카와니시의 앞에서 대성통곡한 고교 졸업식 이후 이야기였다. 카와니시는 강호교의 배구부 주전이자 부주장이었고 게다가 수험생이었다. 물론 이런 이유가 없더라도 의외로 성실한 구석이 있는 카와니시는 바빴을 것이다. 나는 나대로 대학이라는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는 것만으로 벅찼다. 그래도 문득 일상의 틈에서 카와니시가 생각날 때가 있었다. 그것은 외로움이나 그리움 따위를 동반해 한번 찾아올 때면 오래도록 내 곁을 머물렀다.

 

  사이가 좋았던 배구부 부원들끼리의 모임에도 나는 얼굴을 잘 비추지 않았다. 그나마도 카와니시의 불참을 확인하고서야 뒤늦게 합류했다. 첫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날 좇아오는 것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카와니시와 나 사이의 공백이 계속 되던 시간 동안 누군가 다른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 속에서도 늘 귀퉁이를 돌면 한구석에 카와니시가 있었다. 도망친 지 오래인데도 바로 어제처럼 나를 따라왔다. 그리고 어느 날은 떨쳐냈다고 생각했던 카와니시가 예고도 없이 기어코 나를 쫓아오고 말았다. 차가운 입김과 함께 숨을 몰아쉬면서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 카와니시가 내 손을 꼭 잡았을 때, 이제는 잊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뜨거운 카와니시의 손이 너무도 익숙해서 나는 그 손을 뿌리치는 것을 대신해 깍지 껴 고쳐 잡는 수밖엔 없었다.

 

  사랑인지, 외로움인지, 애틋함인지 혹은 미련내지는 후회인지. 그 모든 것을 포함해서 카와니시를 사랑한다. 그 사실만큼은 언제까지고 바뀌지 않을 것이다.

 

 


  "선배."

 

  한껏 잠긴 목소리가 작게 울렸다. 나는 여전히 카와니시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고 있었다. 내 등허리에 두르고 있던 팔을 들어 천천히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카와니시의 손길이 전에 없이 조심스러웠다.

 

  "헤어질 마음 없어요, ."

  "...."

  "선배도 마찬가지잖아요."

  "아니야."

  "두 번은 없어요, 선배. 더는 안돼요."

 

  카와니시의 잠긴 목소리를 타고 나오는 말은 단호한 내 대답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단조로운 어조였다. 카와니시는 하염없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다 손을 내려 부드럽게 내 뺨을 감쌌다. 그대로 고개를 들어 올리게 만들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맞췄다. 어제부터 하루 종일, 헤어지자는 말만 반복하는 연인에게. 건조한 겨울 날씨 탓에 조금 튼 입술이 닿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어 카와니시를 밀쳤다.

 

  "씻고 올게요."

 

  별 다른 말없이 밀쳐졌던 카와니시는 한숨을 푹 쉬고 일어났다. 카와니시는 고개를 양 옆으로 뚝뚝 꺾으며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티셔츠를 벗어 소파 위에 대충 걸쳤다. 그리곤 욕실 문을 열고 들어서려다가 "."하고 깨달은 듯한 소리와 함께 우뚝 멈춰 섰다. 일련의 동작을 뚫어져라 보던 나를 한번 힐끗 보더니 소파 테이블 위에 늘어져있는 차 키, 지갑-내 것도 포함이었다-따위를 한 손에 벅차게 쥐더고 다시 욕실로 향했다. 씻으러 간다던 놈이 무슨 해괴한 행동인가 했더니, 욕실 문을 쥔 채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한다는 말이 가관이었다.

 

  "도망칠 생각하지 마요."




*   *   *




  "추워...."

 

  한 겨울의 바닷바람은 겨우 코트자락이나 입고서 견딜 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차를 내리고 난 후로 겨울에 옷을 껴입는 습관을 없앴던 만큼 더더욱 버틸 길이 없었다.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은 채 연신 춥다고 중얼거리고 있는 걸 보고만 있던 카와니시는 주머니 속 손을 빼앗듯 꺼내더니 제 손으로 감쌌다. 매서운 바람 덕에 평소처럼 뜨겁진 않았지만 여전히 따뜻한 카와니시의 손이었다.

 

  "여기가 어디야, 대체."

  "그러게요."

 

  아침에 낯선 곳에 눈을 떴을 때나 여태 이곳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마냥 찬바람이나 쐬고 있는 것이 억울해 물었더니 황당한 대답이 돌아왔다. 어딘지도 모르고 이런 곳으로 온 거야? 겨울 바다와 하늘은 더 없이 파랗지만 황량하기 그지없는 이곳은 나에게도 카와니시에게도 어떤 인연도 없는 곳임이 분명했고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알려진 명소도 아니었다. 추운 날씨도 날씨지만 이런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묵묵히 걸음을 옮기고 있는 사람은 우리뿐이었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 개미 한 마리 없는 곳이었다.

 

  "너 정말 왜 이러는데."

  "선배야말로 왜 이러는데요."

  "말했잖아, 헤어지자고."

  "왜요."

 

  어제 저녁부터 내리 고장 난 장난감처럼 헤어지자는 내 말에 마찬가지로 고장 난 장난감처럼 왜냐고만 묻던 카와니시가 다시금 물었다. 왜냐고. 선이 반듯하고 다부진 카와니시의 얼굴을 들여다보다 천천히 그의 손을 놓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온기가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신 없어."

  "뭐가요."

  "너랑 더 해나갈 자신이 없다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바싹 가린 채 결국 볼썽사납게 소리치고 말았다가까이서 들리는 철썩이는 파도소리가 처량하게 울렸다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이 삽시간에 느껴졌다. 헤어지자는 말을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려고 했던 이유였는데. 이상하게 카와니시의 앞에서는 눈물샘이 약해졌다. 찬바람에 잔뜩 굳은 손가락 끝에 힘을 줘 얼굴을 더 감싸 쥐었다. 바람소리와 파도소리 때문에 카와니시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대로 손을 떼면, 카와니시는 없는 거 아닐까 생각했지만 당연하게도 그럴 리는 없었다.

 

  "두 번째예요."

  "?"

  "선배가 도망치는 거요."

  "너 아침부터 두 번, 두 번 거리는데 대체 뭐야? 내가 언제 헤어지자고 한 적 있어?"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카와니시의 말에 다행인지 눈물이 쏙 들어갔다. 일부러 짜증스럽게 대꾸하자, 카와니시는 얼굴을 감싸고 있던 내 왼손을 잡아떼더니 다시 손을 붙잡았다. 아직도, 카와니시의 손은 따뜻했다. 기본적으로 약간 뚱하게 무표정한 얼굴인 카와니시였지만 미미한 감정 변화를 읽을 수 있게 된지는 오래되었다. 잠깐 사이에 카와니시는 답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때, 졸업하고 선배 도망쳤잖아요."

  "?"

  "지난 일이니까 안 짚고 넘어갔지만 도망이었잖아요. 분명히 말하지만 난 도망칠 생각 없어요."

  "카와니시, ,"

  "친구들이 하나둘 결혼하니까 불안해요? 아니면 내가 불안하게 만들었어요?"

 

  속내를 속속들이 들켜, 황망하게 얼굴에서 손을 떼자 카와니시가 얼른 마지막 남은 손까지 잡았다. 살이 에이는 것 같던 바닷바람도 잊을 수 있을 만큼의 악력이었다. 두 손을 꽁꽁 붙잡힌 채 카와니시를 노려봤지만 카와니시 역시 시선을 물리지 않았다. 한참을 말 없이 서로를 쏘아보았고 침묵을 깬 것은 카와니시였다. 

 


  "당신과 나라고 해서 아니, 그 누구라고 해도 사랑만으로 매일이 행복하진 않아요."

  "...."

  "그래도 지금 헤어지면, 분명하게 행복은 없어요. 이미 해봤잖아요, 우린. 적어도 난 불행할 거예요. 날 가엾게 여긴다면 선배가 그러면 안 되잖아요. 또 버리면 안 되잖아."

  "타이치, 자신이 없어. 네가 옆에 있어도 불안하고 무서워."



  실체 없는 사랑만을 가지고 서로를 믿기에 우리 사이의 공백은 무시할 수 없었다. 카와니시를 감싸고 있는 살갗마저 저주스러울 정도로, 그를 가장 가까이에서 만지고 싶었다. 아무리 사랑을 말해도, 아무리 피부를 맞대도, 아무리, 아무리.......

 

  널 가졌는데도 널 가지지 못하는데. 눈 가리고 아웅 하며 어중간한 행복으로 만족할 바에야 나는 차라리 완벽하게 너로 인해 불행한 생애를 원했다.

 

  사랑해, 타이치.


 

  "사랑해요. 그거면 안돼요?"

 


  구름 한 점 없이 맑던 하늘에서 부스러기 같은 눈이 내렸다. 바닷물에 닿자마자 덧없이 사라지는 그것을 보며 나는 타이치의 손을










오래오래, 오래된 연인  

카와세미 : 카와니시 타이치, 세미 에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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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할 정도로 평탄히 잘 풀린 하루였다. 평소보다 조금 늦게 나와 지각인가 싶었는데 오늘따라 출근길 정체가 없었고, 점심식사 때는 단골 덮밥 집에서 새우튀김을 하나 더 얹어주었고, 유달리 날 가만두지 못하는 상사는 오후부터 외근이었고 그 길로 퇴근하겠노라는 연락까지 주며 거의 몇 주 만에 정시 퇴근을 할 수 있었다. 이제 막 해가 넘어가기 시작하는 하늘을 보면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노라면 문득 해가 짧아졌고 주변 온도가 서늘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추워.” 조그맣게 혼잣말을 했더니 어쩐지 더 추워지는 것 같았다. 어깨를 움츠린다고 추위가 가시지 않을 걸 알고 있지만 어쩐지 조금 어깨를 웅크린 채로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엘리베이터마저 딱 바로 주차장에 멈춰있었기에 버튼을 누르자마자 문이 열렸다. 아니, 이제 좀 무서울 지경인데. 좋다 못해 이젠 오히려 떨떠름했다.

 

  손에 쥐고 있던 차키와 집 열쇠를 신발장 위에 던져놓고 빠르게 복도를 가로질러 불도 켜지 않은 채 거실의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2인용으로 제작된 소파는 누워있기엔 조금 벅찬 감이 있었지만 그 정도가 딱 좋았다. 으음, 오늘은 정말 이상할 정도로 평탄히 잘 풀린 하루였다


  이제 딱 하나만 더 충족되면 평탄히 잘 풀린 하루정도가 아니라, 완벽한 하루가 되지 않을까. 뺨에 닿는 쿠션에 얼굴을 몇 번 비비다가 가만히 숨만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타이치. 내가 먼저 연락해볼까.



 

  타이치와는 이제 햇수를 세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오래된 연인이었다. 고교시절부터 곧 삼십 줄에 들어서는 나이가 다된 지금까지 사귀고 있었으니 우리 둘의 관계를 알고 있는 지인들 사이에선 거의 부부 취급이었다. 그 긴 연애를 돌이켜보면 지루할 틈도 없었다. 한 시도 떨어져있기 싫었던 불같은 때가 있기도 했고 하루걸러 하루 시답잖은 싸움을 하는 때도 있었다. 무엇이 그리 서러웠는지 얼굴도 보기 싫어 잠수를 탔던 권태기도 있었고-이건 지금까지도 술만 마셨다하면 타이치에게 꼭 한 마디를 듣는 일이었다.-사라질 기미가 안 보이는 현실의 벽에 진지하게 헤어짐을 고민하던 때도 있었다


  매일이 행복한 아름다운 연애는 못될지언정 주변에 세기의 사랑이라느니 사랑과 전쟁이라느니 야유를 듣는 찐한 연애를 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눌러담을 수 없는 사랑스러움과 함께 보낸 즐거운 시간, 수 없이 많았던 다툼과 타인들과 우리로부터 비롯된 상처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를 향한 신뢰가 지금의 우리를 만들어주었다.

 


  아, 갑자기 사무치게 타이치가 그리워졌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마자 급하게 품을 뒤져 휴대폰의 잠금을 풀자마자 바로 메일이 떴다. 타이치였다. 새카만 거실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고 있는 휴대폰이 타이치의 메일을 담고 있다는 것만으로 사랑스럽다고 생각하고 마니, 그야말로 중증이었다. 

 


  [선배, 어디예요? 보고 싶어요.]

  "."

 

  작은 액정에 짧게 적힌 메시지에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서로에게 솔직할 수 있는 것은 오래된 연인의 특권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을 얼버무리는 습관이 있는 내가 이렇게까지도 바뀔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타이치 덕이었다. 끈질기게 나를 설득하고 마지막까지 손을 놓지 않는 타이치.

 


  "나도. 빨리 보고 싶어, 타이치."

 


  널 기다리는 일 분, 일 초가 너무도 길다







 

  세미는 차트를 천천히 덮었다. 군더더기가 전혀 없는 손동작과는 달리 어딘가 석연치 않은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였다. 카와니시, 카와니시.. 세미는 이미 덮어버린 차트의 위쪽에 적혀있던 환자의 이름을 곱씹었다. 세미가 카와니시라는 이름을 들으면 잘 손질된 중단발머리의, 단정한 인상의 여자가 떠올라야 하는 게 우선이었지만, 어쩐지 그녀의 옆에서 시종일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남자의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마지못해 따라왔다는 인상을 주는, 다소 눈매가 사나운 미남자의 얼굴이었다. 그는 언제나 입을 다물고 시선을 무릎에 놓인 자신의 손에서 떼지 않았다. 간혹 세미가 그를 부르거나 이야기에 틈이 생기거나 하면 슬쩍 눈을 올리기도 했지만 그런 일은 잘 없었다. 딱 봐도 세미의 진료실이 불편해 하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많은 남자들이 세미의 진료실을 불편해했지만 다수의 불편함과는 다른 인상을 주었다. 세미는 쉽게 그를 꿰뚫어봤다.

 

  그럴 때면 세미는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중얼거려볼 뿐이었다.

 

  카와니시 씨, 나랑 동류구나.






선생님, 가르쳐주세요. 

카와세미 : 카와니시 타이치, 세미 에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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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다음 진료시간에 뵐게요."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항상 그랬듯 예약시간을 딱 맞춰온 그녀는 언제나 같은 진료와 같은 이야기를 듣고서도 얼굴 한 번 찌푸린 일 없었다. 한줌 미소를 띤 것도 아니었지만 방어적인 무표정도 아닌 자연스러운 얼굴로 담담히 세미의 말을 듣고 간간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관의 뻔한 안내멘트를 하는 기분이 된 세미 쪽이 오히려 저도 모르게 얼굴을 몇 번이고 찌푸릴 뻔 했지만 이내 다잡았다. 단정한 외모만큼이나 단정한 목소리로 그녀가 세미를 향해 인사를 하자, 세미 역시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그녀가 사뿐히 고개를 숙이고 조용한 동작으로 세미의 공간을 빠져나고서야 세미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선생님, 카와니시 씨가 오늘 마지막 환자였는데요."

  ", . 정리하고 들어가 보세요. 전 아직 더 봐야하는 게 남아서."

 

  짧은 노크와 함께 문을 연 간호사는 몸을 반쯤만 내밀고 말했다. 빨리 퇴근하고 싶은 눈치를 전혀 감추지 않는 태도에 세미가 그것을 받아주자 함빡 웃음을 지은 간호사는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하고 빠르게 빠져나갔다. 오늘도 데이트인가? 세미는 간호사의 손톱이 손질된 가는 손이 잡고 있던 문을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하고 기지개를 켰다.

 


  카와니시 씨가 다녀간 날은 항상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만다. 그것은 카와니시 씨가 한 명일 때도, 두 명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세미는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 톡 반복적으로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카와니시 부부가 세미의 진료실로 찾아든 지 벌써 3개월 째였다


  카와니시 부부가 처음 진료실의 문을 두드린 날, ', 이 사람 유명한 운동선수 아니었어? 축구나 야구는 아닌데아 맞아! 배구!' '맞아, 잘생긴 걸로 유명하잖아.'하고 소리를 죽여 호들갑을 떨던 간호사들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겨우 29살에 불임클리닉을 드나들다니, 뭔가 부부 관계 쪽이 문제 있는 거 아니야?' 의미심장한 웃음소리와 함께 덧붙이던 목소리 역시도 생생했다.

 

  세미는 간호사들이 간혹 쓸 데 없는 수다를 떠는 걸 싫어했지만, 카와니시 부부와의 첫 상담이 끝나고 이번에는 과연 그녀들의 짐작이 맞았구나하고 감흥 없이 동의했다.

 


  '실례되지 않는다면, 부부관계는 어떤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아아…. . , 나쁘지 않아요. 그런데 쉽게 아이가 생기질 않아서, 이런 곳까지 찾게 되어버렸네요.'

 

  산부인과가 아니고서야 이렇게 직접적으로 들을 일이 잘 없는, 세미의 직설적인 물음에 대한 부부들의 반응은 매뉴얼이라도 되는 것처럼 정해져 있었다. 으레 부인 쪽은 얼굴을 조금 붉히고 고개를 살짝 숙이기 마련이고 남편 쪽은 단호한 표정으로 아내를 감싸며 대답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카와니시 부부는 매뉴얼을 지키지 않는 이레귤러였다. 부인은 잠시 당황한 듯 대답에 틈을 두었지만 얼굴이 붉어지지도 않고 술술 대답했다. 마치 몇 번이고 이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는 사람처럼, 한껏 자연스럽게. 다만 그때에도 그후에도, 남편 쪽은 아무 말도 없이 부인의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다 곧 세미의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볼 뿐이었다.




*   *   *




  "그러니까, 상담 오는 부부 중에 게이가 있다고?"

  "목소리 좀 낮춰줄래? 일단 병원 근처고."

 

  급하게 말을 덧붙인 세미가 업무 중에 가끔 끼는 안경을 벗으며 갈무리했다. 탁! 소리가 나게 안경통을 덮으며 텐도를 노려보는 세미의 날카로운 눈빛에 굴하지 않고 텐도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리곤 천천히 잔을 들어 입을 축일 정도로 작은 맥주 한 모금을 마시고 세미를 빤히 쳐다봤다.

 

  고등학교 부활동 시절부터 이어져 온 이 악우와의 인연은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함께 부활동을 했던 부원들 모두 잘 뭉치고 연락도 잘 이어가고 있긴 했지만, 텐도와 이렇게 개인적인 연락이 이어질 줄은 그 당시로선 꿈에도 몰랐다. 어이없게도 이 악우와의 끈질기고도 남다른 인연의 계기는 그 몇 십 명의 부원들 중 소수의 성적 취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세미가 텐도에게 들켜버리고 만 일 때문이었다. 왜 하필 제 짝사랑을(상대는 같은 배구부 부원이었다)텐도에게 들켜버린 걸까 자책했지만, 벼락같이 쏟아질 거라 예상했던 부산스러운 비난의 말도 없었고 경멸하는 눈치도 없었다. 그저 황망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손을 작게 떠는 답지 않게 무언의 텐도를 보고 세미는 하필 텐도에게 들킨 것이 아니라 다행히도 같은 부류의 인간에게 들킨 것이란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어쨌든 지금은 술자리의 안주거리조차 못되는 재미없는 옛날 이야기였다. 그리고 텐도에게는 재미없는 옛날 얘기보다 지금 세미의 이야기가 더 재미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근데 그거 너랑 상관없지 않아? 그냥 진료만 하면 되는 거고."

  "일단은 의사니까. 그리고 아마부인도 남편이 게이인 걸 알고 있는 눈치인데 웃기지도 않는 연극에 어울려줄 마음도 없고."

 

  세미가 정갈하게 접시에 누워있는 꼬치구이의 끝의 구운 토마토를 애꿎게 젓가락으로 짓뭉개며 중얼거리다시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텐도는 세미의 젓가락질을 빤히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덧붙이는 말은 뾰족했지만 세미는 성실한 면을 넘어서서 남들 일에 관여하고 마는 오지랖이 있으니까 내심 신경 쓰고 있을 것을 알고 있는 텐도는 혼자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잔을 들어 맥주를 한 모금 삼켰다. 세미는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무표정한 얼굴이 차가워 보인다는 평판 탓에 의식적으로는 늘 웃고 있는 기본인 세미이기도 하고, 남들보다 눈치가 조금 빠른 텐도이기도 해 텐도는 가만히 세미의 눈치를 살폈.

 

  ". 너도 아는 사람일 수도?"

  "?"

  "그 환자 말이야."

  "누군데?"

 

  관심 없는 걸 팍팍 티내며 김새는 투로 감탄사를 뱉은 텐도가 목소리와는 달리 눈으로는 세미의 시선을 쫓았다. 이미 배구의 세계를 떠나 한 명의 의사가 된 세미, 한 명의 패션업계 디렉터가 된 텐도였지만 아직도 두 사람은 종종 배구경기를 보거나 이야기하기도 했으니 카와니시에 대해 텐도 역시 알 수 있겠다 싶어 입을 열었지만 바로 다음 순간 아차 싶었다. ", 그래도 말하면 아웃팅인 건가." 세미가 작게 중얼거리자, 텐도는 굳이 누군지 다시 묻지 않았지만 눈을 재차 동그랗게 뜨고 세미를 바라봤다. 제 알 바 아니니 말하라는 무언의 눈동자에 세미는 "하하."하고 소리 내며 웃었다. 자기 일 아니라 이거지. 이상한 데서 포기할 줄을 모르는 놈이니까. 세미는 거절하는 웃음에도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치우지 않는 텐도를 보며 세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애초에 말을 먼저 꺼낸 건 자신이니 제 잘못이었다.

 

  "카와니시 타이치라고, 현역 선수라던데. 알아?"

  "카와니시 타이치? 거짓말이지?"

  "내가 너한테 거짓말해서 뭐하냐."

  “, 대박. 게이였어?! ! 대박! 어쩐지!”

  “, 미쳤어? 조용히 해!”

 

  별안간 작게 소리를 지르는 텐도에 깜짝 놀란 세미가 텐도의 입을 틀어막으려고 하자, 텐도는 손을 살래살래 흔들며 입을 다물었다. 겨우 조용해진 텐도를 노려보며 세미는 질린다는 표정을 하고 반쯤 차 있는 잔을 깨끗이 비웠다. 텐도는 야단법석 떨던 것을 그만두고 제 폰을 한참을 두들기고 있었다. 업무 연락이라도 왔나 싶어-텐도의 일은 36524시간 때를 가리지 않고 날아들었다-가만히 그 요란한 빨간 머리통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텐도가 돌연 고개를 팍 들더니 제 폰을 세미의 눈앞으로 들이밀었다. ", 뭔데." 떨떠름한 눈으로 세미가 조그만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 이거..."

  "카와니시 타이치. 배구 선수기도 한데, 우리 쪽에선 모델로도 유명하다고.”

  "진짜?"

  "TV도 안 봐? 촌스러운 세미세미."

 

  작은 액정 속에는 깔끔한 수트 차림의 카와니시의 흑백 사진이 담겨있었다. "사실 카와니시 군은 미디어에서 더 유명할걸?"이라고 덧붙인 텐도의 말마따나 액정 속 카와니시는 스포츠 선수보다는 모델이라는 타이틀이 더 어울렸다. 늘 그랬던 것처럼 무심하게 내리깔고 있던 쳐진 눈매 속에서 번뜩이는 날카로운 눈빛이 매력적이었다. 세미는 저도 모르게 텐도의 폰을 꼭 잡고 있었다.

 

  "얼굴 잘 생겼겠다, 운동선수니 키도 몸매도 훌륭해, 말수도 없어서 구설수에 오른 일도 없고."

  "너 잘 안다?"

  ". 이번에 우리 론칭하는 라인에 모델로 오퍼 넣었거든."

 

  유명세만으로 패션 업계의 일을 넘보는 유명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텐도가 이리 말할 정도니 세미는 새삼 카와니시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 싶어 감탄했다. 그건 그렇고 진짜 잘생기긴 했네. 액정 속 흑백의 카와니시의 사진을 물끄러미 내려다는 보는 세미의 눈이 거기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 사진 나 보내줘."

  "그러고 보니까, 에이타군은 이런 스타일 좋아했었지?"

 

  내가 그랬나?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여전히 화면 속 카와니시를 보고 있노라니 텐도가 인심 썼다는 듯한 목소리로 "이거 테스트 용 사진이니까 밖으로 빼돌리면 안 돼."라고 덧붙이며 제 폰을 받아갔다.




*   *   *




  "저...... 오늘은.. 무슨 일로?"

 

  맞은편에 앉은 카와니시의 눈매가 평소보다 조금 누그러져있었다. 부인 쪽이 아닌, 남편 쪽 카와니시였다


  지난 주, 텐도와 카와니시의 이야기를 한 것이 그에게 들킨 것처럼 괜히 찔렸다. 주변에서 넌 좀 너무 무상하다는 말을 종종 듣는 세미였지만 오늘만큼은 생각이 마구 들끓다 못해 넘쳤다. 그러다보니 일하는 중만큼은 누구보다 똑 부러지는 세미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었다


  세미는 제 책상에 놓인 업무용 캘린더를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분명히 오늘은 카와니시라는 이름의 사람-부인 쪽은 물론이고 남편 쪽도-과의 상담은 없었다. 세미는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며 책상 밑으로 숨은 손을 만지작거렸다. 카와니시는 언젠가 세미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봤던 것과 마찬가지로 세미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세미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입을 뗐다.

 

  "오늘, 상담을 잡으신 것도 아닌데. 뭔가 특별한 일이 있나요?"

  "'특별'한 일인가요... . 그렇죠."

 

  '특별'이라는 단어에 카와니시가 반응하는 것이 세미는 의아했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계속 말해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부인과 개별 상담은 많이 했지만 카와니시가 혼자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고, 동반 상담일 때도 말이 없던 카와니시에게서 들을 수 있는 말은 겨우 '', '아니오하는 대답 정도여서 제대로 된 말을 처음 들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어졌습니다."

  "?"

  "아내와 헤어졌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헤어졌다고? 부인이랑? 그걸 왜 나한테 말해? 여기 산부인과 클리닉이지 정신과 아닌데? 가정법원도 아니고?

 

  세미의 눈동자가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걸 눈치 챈 카와니시가 눈매를 누그러뜨리고 웃었다. , 웃었네. 그 와중에도 세미는 역시 얼굴만큼은 잘생겼다고 쓸 데 없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의 말에 무어라 딱히 대답할 거리를 찾지 못했다.

 

  "원래부터 제대로 된 부부가 아니었어요."

  "저기, 카와니시 씨."

  "전처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게이거든요."

  "?!"

 

  세미는 갑작스럽고도 일방적인 카와니시의 성정체성 고백에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이 사람, 머리가 어떻게 됐나? 이걸 왜 나한테 와서 말해?! 세미는 당황한 기색을 전혀 숨기지 못하고 카와니시를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카와니시는 조금 전 웃음기가 아직 빠지지 않은 누그러진 눈매로 세미를 바라보며 의자를 세미 쪽으로, 조금 끌었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있지만 키가 크고 팔이 긴 카와니시가 조금만 손을 뻗어도 금세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부인과 헤어지신 건 유감스럽네요. 그런데 왜 그런 걸 저한테 말하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갑작스럽게 좁혀진 거리에 당황한 세미가 기세 좋게 말을 쏟아냈지만 끝에 가서는 결국 조그맣게 말꼬리를 흐리고 말았다. 아 젠장. 매 상담 때마다 입을 여는 일이 거의 없던 카와니시였기에 세미는 일방적으로 카와니시를 말수가 적은 사람으로 생각했었는데, 그 인상과는 매우 상반되게 카와니시는 아주 잘만 떠들어댔다. 카와니시의 힘을 주지 않은 나른한 눈매 속에 숨겨진 매서운 갈색 눈이 세미를 빤히 쳐다봤다. 그 눈빛에 세미는 괜스레 바지 주머니에 고이 모셔놓은 폰을 슬쩍 쓸었다. 텐도와 술자리를 가진 날, 텐도에게 받아 저장한 카와니시의 사진의 존재를 카와니시에게 들키기라도 한 것 같았다.

 

  "제가, 세미 에이타 선생님한테 관심이 있습니다."

 

  카와니시의 매서운 눈매가 한순간 완벽하게 누그러지며 웃음기를 띄었다. 세상에, 진짜 잘생기긴 했는데…… 그 순간에도 세미는 멍청하게 그런 생각이나 하며 입을 떡 벌렸다.

 

  "저랑 만나보죠, 선생님."

 


  저 사람, 지금 대체 뭐라는 거지?! 세미의 입은 아직도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

뒷내용은 나중에...다음에...


언제까지 다정한 연애를 할 수 있을까

카와세미 : 카와니시 타이치, 세미 에이타

w. cocomero






  타이치를 향한 감정을 생각할 때면 물속에 갇혀 억지로 숨을 참고 있는 것과 유사한 괴로움을 느꼈다. 누군가 억지로 떠민 것도,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누르는 것도 아니었는데 스스로 움직이질 못했다. 코를 막고 입을 다물고 있으면 몸속의 공기가 팽팽하게 돌며 현기증을 느꼈지만, 숨을 들이쉬려 입을 여는 순간 들이닥칠 그것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더 숨이 턱 막혔다.


 

  타이치는 늘, 다정한 표현들을 아끼지 않았다.

 

  선배, 하고 낮게 부르는 일상적인 부름마저 그 목소리에 애정이 듬뿍 담겨있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거침없지만 부드럽게 다가오는 손길의 체온과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눈빛도 다정했다.

 


  "...선배."

  "? 깼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바닥에 발을 두고 침대에 앉아있는 내 허리를 잡는 타이치의 손길은 잠에 잔뜩 취한 목소리와는 대조될 정도로 단단했다. 허리를 꼬옥 안고 있는 그의 팔을 부드럽게 쓸자, 내 등에 머리카락을 부비는 동작이 자연스러웠다. 타이치는 좀처럼 잠을 빨리 털어내지 못하는 타입이었다. 얇은 면 티 위로 닿는 그의 머리카락이 간지러워 조금 웃으며 그의 팔을 천천히 쓰다듬어주었다. “더 자, 토요일이잖아.” 타이치는 여전히 내 등에 머리를 대고 그것을 끄덕였다. “선배는...” 잠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가 달라붙었다. "난 너 재우고 거실로 나갈 거야." 타이치의 잠이 달아나지 않도록 조그만 목소리로 얼른 대답하자 그는 다시 한 번 머리를 끄덕였다. 한 쪽 팔을 뒤로 뻗어 타이치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잠든 듯 숨을 고르게 쉬는 걸 확인하고서야 그의 팔을 조심스럽게 풀고 거실로 나갈 수 있었다.

 

 

  다정한 타이치.

 

  나는 속으로 그 말을 곱씹었다. 타이치는 객관적으로 연인에게 매우 다정한 사람이었다. 짧지만 틈틈이 걸려오는 전화와 문자, 일상에서 내가 스치듯 말했던 것을 잊지 않는 섬세함. 그리고 목소리와 말투, 눈빛, 손길에 스며있는 조심스럽고 따뜻한 느낌. 사랑받는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그의 모든 것들은 마찬가지로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것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최근의 그가 하는 행동에서 위화감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이따금 울리는 전화나 문자를 보고 얼굴을 조금 찌푸리고 액정을 엎어놓거나 아예 전원을 꺼버리는 행동이 잦아졌다. 그러곤 한동안은 말없이 얼굴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겨버리고 마는 것이다. 타이치가 나를 연인으로써 편안히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타이치의 그런 표정과 행동들이 신경 쓰이기보다는 타이치에게선 좀처럼 보기 드문 어리광쯤으로 받아드렸다. 그러나 횟수와 빈도가 잦아질수록 나마저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겨버리고 말았다.

 

  타이치, 대체 누구야? 입 속에 맴도는 말을 뱉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게, 마치 타이치를 탓하는 것만 같고 의심하는 것만 같은 뉘앙스를 지울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는 타이치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편이었다. 오랜 지인인 텐도에게 묻자(물론 텐도는 우리 사이를 모른다. 그저 여자친구라고 칭하고 물었을 뿐이다)텐도는 눈을 둥그렇게 뜨곤 물었다. 사귄지가 몇 년인데 그 정도도 묻지 못하느냐고. 순간 대꾸할 말을 잃었다. 타이치와는 거의 10여년을 넘게 함께하고 있다. 타이치와 만난 시간이 내 인생의 반 이상이 되는 것도 아주 먼 일은 아니었다.

 


  다정한 타이치. 다정함에 익숙한 나.

 

  당연하지 않은 것들을 당연히 받아드리고 있는 새에 보통의 연인의 소통에서 멀어져버렸구나.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었다. 다정함은 서로를 사랑하기에 비롯된 것이지만 많은 것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상처주고 싶지 않고, 이 텐션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까지, 어디까지 다정할 수 있을까, 타이치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자 이제는 타이치의 폰을 울리는 발신인이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 관계의 비이상적인 것들을 목도한 것이었다. 그때부터 벌써 한참을 제대로 된 잠을 잘 수 없었다.

 

  한껏 예민해져있었지만 어제만큼은 타이치와 몸을 맞댄 탓인지, 고작 하룻밤이나마 제대로 깊게 잠들 수 있었다. 조금 눈을 붙이고 한결 가벼워진 머리로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오늘은 타이치에게 물어봐야지. 어쩔 수 없다. 상처받아도 어쩔 수 없고 다정한 연애가 깨져도 어쩔 수 없다. 늦건 빠르건 현실이라는 것은 인정해야 하는 것이기 마련이었다. 비록 이전 같은 다정함은 없더라도, 그와 이야기해야 했다.

 

  물론 오랜만에 잠을 자서 정상적으로 가동한 머릿속 덕분이라든가 텐도의 일침이 계기는 아니었다. 이번 주 화요일, 그러니까 나흘 전 가벼운 미팅 중에 후배 녀석이 뱉은 말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저 세미 대리님 지인 봤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이 녀석이 아는 내 지인이 누구지? 정도만 생각하고 별 생각 없이 "누구?"하고 물었다. "회식할 때 가끔 대리님 데리러 오는 대리님 후배요. 지난 달 말이었을 건데." 타이치였다. 속으로는 깜짝 놀랐지만 놀란 기색을 빠르게 숨겼. 타이치가 회식 때 나를 데리러 왔던 일은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정말 드문 일이었는데, 잘 없는 상황이다 보니 오히려 후배 녀석의 기억에 남았었나보다. 그러더니 덧붙여지는 말에는 더 깜짝 놀랐다. ", 그날 선 보러간다고 했었잖아요. R호텔에. 그분도 선보는 모양이던데요? 아무튼 들어보세요, 저희 어머니가 어찌나 성화인지......"

 

  그 후로 금방 정신을 차려, 녀석의 잡담을 멈추고 미팅을 마무리했지만 머릿속에 빙빙 도는 단어는 '타이치' '호텔' '' 이었다. 어느새 내 나이는 서른이었고 타이치는 스물아홉이 되었다.



  타이치는 어디까지 다정할 수 있을까. 

  우리의 다정한 연애는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선배."

  "일어났어?"

 

  타이치는 내가 일어나고 꼬박 3시간을 더 자고서야 거실로 나왔다. 그나마도 아직도 잠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이었다. 특별히 보고 있진 않지만 조용한 거실이 답답해서 볼륨을 낮춰 틀어놓았던 TV에서는 오늘의 날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정오 뉴스였다. 타이치는 긴 다리를 휘적거리며 내 옆에 쓰러지듯 풀썩 앉으며 내 허리를 감아왔다. 아직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는 모습이나 막 깬 탓에 아직 뜨끈한 체온이 사랑스러워 타이치의 볼에 가볍게 키스하며 웃었더니, 여전히 눈도 못 뜬 주제에 그의 입 꼬리도 씨익 올라갔다.

 

  이런 타이치와의 일상이 언제까지고 이어졌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한 번 벗어나기 시작한 톱니바퀴는 새로 끼우지 않으면 도리 없이 엇나가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타이치의 머리카락을 하염없이 쓰다듬으며 몇 번 더 그의 볼에 키스했다. 오랜만에 맞는 타이치와의 기분 좋은 주말의 시작을 망치려는 것이 내심 불안했던 건지, 계속 타이치의 살을 만지작거리고 싶었다. 

 

  "타이치."

  "."

  "너 자는 새 전화 몇 번 울렸어."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말하며 허리에 감긴 타이치의 손등을 살며시 쓸었다. 타이치는 내 어깨에 고개를 묻고 찰싹 달라붙어 숙이고 있던 몸을 천천히 뗐다. 그 와중에도 허리에 감은 손은 풀지 않는 것이 타이치다웠다. 타이치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으려는 기색이 만연한 눈길로 내게 눈 맞췄다. 조금 전까지 잠에 취해있던 것이라곤 믿기 어려울 아주 곧은 시선이었다.

 

  "받았어요?"

  "아니."

 

  타이치는 입을 다물고 그의 전화가 울릴 때면 이따금 보여주던 찌푸린 얼굴이 되어버렸다. 평소 나는 타이치의 전화가 울리건 말건 신경쓰지 않았. 물을 마음을 가져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당연한 것처럼 네 곁에서 눈을 뜬, 오늘은 확인해야 했다. 확인 받고 싶은 것이 있었다, 네 목소리로.

 

  "네가 싫어할 것 같아서, 안 받았어."

  "선배."

  "할 말 있지 않아?"

 

  덧붙이고 타이치의 팔을 벗어나 부엌으로 발길을 향했다. 타이치의 팔은 아주 쉽게 나를 놓아주었고, 일어서서 발을 떼는 순간까지 그에게선 아무 말도 없었다. 되도록 느린 동작으로 인스턴트 커피 두 잔을 내릴 때까지도 그에게선 아무 말이 없었다. 타이치에게서 아무 말도 없자 나는 조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고소한 커피향이 집 안을 채우는 것처럼 불안이 내 입안을 가득 채웠다. 모른 척 하는 것이 좋은 일었을까.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것만이 좋았을까.

 

  나는 부엌에 딸린 작은 아일랜드 식탁에 앉으며 한 잔의 커피는 내 쪽에 그리고 나머지는 맞은편에 놓았다. 그러고 나서야 거실 소파 쪽으로 눈을 돌리니, 쭉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듯 이쪽을 보고 있던 타이치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한숨을 한 번 쉬고 "타이치, 이리 와."라고 말하며 그에게 손짓을 했다.

 

  마주 앉는 타이치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언젠가 나의 배구부 은퇴식 때, 내게 고백한 때의 타이치의 표정과 닮아있었다. 늘씬하게 쳐진 눈매가 조금 사납던 평소와 달리 누그러져있었다. 무언가 생각을 잔뜩 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그게 뭔지 가늠하기가 어려운 타이치의 복잡한 표정. 나는 내 몫의, 김이 나는 따뜻한 머그잔을 가볍게 한 손에 쥐었다. 조금 긴장한 모양인지 손끝이 찬 것이 스스로도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타이치. 나는,"

  "제가 먼저요. 선배, 제가 먼저 말할래요."

  "그래. 말해봐."

 

  타이치는 이제는 잠이 아주 다 깬 얼굴을 찌푸렸다. 말을 해보라고 했건만 오히려 입을 꾹 다물고 머그잔을 쥐고 있던 내 손과 식탁에 얹어져있던 내 손까지, 제 쪽으로 끌어와 꼭 잡았다.

 

  힘들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우리였고 그런 만큼 더 철저히 주변에 우리를 숨겼다. 부모님도 친구도, 심지어 우리가 함께 지내던 배구부 부원들까지도 우리 사이를 몰라야 했다. 그렇게 숨을 참으며 억지로 꾹꾹 눌러왔던 것은 우리가 우리로 있기 위함이었고, 잡고 있는 손을 놓고 싶지 않았던 현실도피이기도 했다. 이따금 내가 보았던 타이치의 집안에서 타이치는 형제 중 막내로 어머니의 각별한 애정을 받고 있었고, 그에게 결혼하라는 압박이 적잖았을 것 역시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나부터가 잘 인지하고 있는 그 사실들로 나는 불안함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나는 타이치가 내 손을 놓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다.

 


  "선배, 미안해요. 선배가 생각하는 거 맞아요. 어머니가 이미 약속을 잡아놓은 바람에..."

 

  그래도 식사도 하지 않고 거절했어요. 이미 함께 할 사람이 있다고 했어요. 미안해요, 선배가 모르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머니께는 분명하게 말씀드렸는데도, 아직도 계속 연락이 오셔서......

 

 

  공백을 메우는 타이치의 목소리가 듣고 있기 힘들었다. 그는 연신 붙잡고 있는 내 손을 달래듯 느리게 문지르며 이렇게, 저렇게 말을 꺼냈다. 너와 손이 닿고 있는데도, 손끝이 다시 따뜻해질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알고 있어, 네가 어떻게 했을지는."

  "미안해요, 정말."

  "그래도 말이야. 이런 일이 생길 때면 생각해버려. 내 나이가 서른이고 너도 곧 서른이야."

 

  응, 이라고 입 안으로 소리를 울리며 짧게 대답하며 타이치는 내 눈을 바라보며 내 손등에 가볍게 입술을 내렸다. 부쩍 추워진 날씨로 조금 튼 그의 입술이 닿는 느낌이 생경했다.

 

  "우리가 우리로 있으려면 놓아버려야 할 것들이 점점 무거워져, 타이치."

  "아니에요, 선배. 아니야."

 

  내 말을 자르는 타이치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그 다급함에 안심하면서도 어쩔 줄 몰라 하는 내가 있었다. 숨을 한 번 삼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다급했던 타이치의 목소리만큼이나 빠르게.

 

  "오늘 내가 이야길 꺼낸 건……. 그냥, 그냥 말이야. 그런 게 버겁다고 느끼게 되더라도 괜찮다는 거야. 그 때가 오면 우리도 남들처럼, 보통 연애처럼 헤어지자."

  "제발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선배."

  "타이치, 지금 당장 헤어지자든가 그런 말이 아니야. 그냥.. 그때가 오면 억지로 붙잡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어."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쉬워요…. 선배.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그냥 그렇다는 거야, 타이치. 난 너에게 아픈 기억으로 남고 싶지 않아."

  "아니. 제발, 그렇게 포기하지 말아요. 손 놓을 생각도 하지 마요. 안돼요, 네?"

 

  타이치에게 붙잡혀있는 손은 어느새 저릴 정도로 세게 잡히고 있었다. 가라앉은 타이치의 눈동자에서는 물기를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거의 흐느낌에 가까웠다. 우리에 대한 자신과 불안이 한 데 엉켜 해소할 줄 모르는 나는 타이치의 손을 놓지 않았다. "에이타, 에이타." 흐느낌과 같은 타이치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사랑해." "...날 밀어내지 말아요." 이어지는 말에 눈을 감았다. 내 손을 붙잡고 있는 타이치의 손길이 못내 안타까웠다. 


  타이치나는 그냥 너에게 잠겨 죽고 싶어. 사랑을 말하는 타이치의 목소리가 이다지도 먹먹했던 날이 있었을까. 이렇게 괴로운 마음이 사랑인 걸까. 타이치. 

 

  몹시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Don't you wait no more

카와세미 : 카와니시 타이치, 세미 에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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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학교 1학년, 처음으로 사귀게 되었던 그 여자애와의 관계는 금방 실패로 끝났다. 이제 와서는 그 이름도 어슴푸레한데다가 얼굴마저 떠오르지 않았고, 한여름 햇살 아래서 하늘거리던 그녀의 세라복 치맛자락만이 아주 희미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그렇게 첫사랑을 실패하고 곧이어 찾아왔던 두 번째에도 나는 실패했다. 마찬가지로 세 번째도, 네 번째도그리고 이제는 몇 번인지도 모를 그녀와도 어제부로 끝났다. 관계의 끝을 맞을 때면 무엇이 문제였는지 시간을 들여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늘 그래왔듯 이번에도 잘 모르겠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살랑거리는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고 거리낌 없이 내 팔뚝에 팔을 감아왔으며, 그때마다 부드러운 살결의 감촉에 딸려오는 그녀들의 좋은 냄새가 나는 좋았다.

 


  세미 에이타 : 어디

  세미 에이타 : 설마 대출?

  세미 에이타 : 양심 없는 놈

 

  나는 침대에 모로 누워 폰에 눈을 고정한 채로 하릴없이 포털 사이트의 검색어를 순서대로 눌러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상단바에 연속적으로 떴다가 빠르게 사라지는 선배의 메시지는 미리보기로 읽기만 할 뿐, 읽씹도 아닌 안 읽씹을 선사해주었다. 언젠가의 술자리에서 선배가 내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고는 그대로 뽑을 기세로 잡아당기며 '차라리 읽고 씹으라니까?!??'라고 온 가게가 떠나가라 외쳤던, 잔뜩 뭉개진 발음의 격앙된 목소리가 당장이라도 들릴 것처럼 생생했다. 그래도 역시 오늘도 안 읽씹이다.

 

   세미 에이타 : 타이치 괜찮아?

 

  몇 분 동안 별 다른 메시지가 더 안 날아오기에 이제 잠잠하다 싶었더니 다시금 뜨는 메시지는 아니나 다를까 또 선배였다. 안 괜찮을 건 또 뭡니까. 속으로만 대답하며 알림센터에서 메시지 미리보기를 죄다 지웠다. 선배는 이럴 때마다 나를 어김없이 '타이치'라고 불렀다. 선배는 주변 사람들에게 입으로는 툴툴대지만 행동은 알게 모르게 다정한, 세간에서 이르기를 츤데레라고 하는 캐릭터로, 나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기묘한 짓을 일삼는 사람이었다. 츤데레인 선배는 꼭 이럴 때, 그러니까 내가 여자 친구에게 차였을 때 말이다. 이럴 때만큼은 선배는 그 듣기 좋은 목소리로 예쁘게 그 입술을 움직이고 성대를 울려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고 날 위로했다. 나는 이런 건 정말 치사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하릴없이 액정 구석구석을 눌러보고 있던 손을 우뚝 멈추고 눈을 감았다. 잠시 동안 그렇게 가만히 있다가 이불을 끌어다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나서야 다시 눈을 떴다.

 

  세미 에에타는 나보다 한 학년 위의 선배였다. 선배는 입 다물고 가만히 있기만 하면 선이 매우 뚜렷한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사실 처음엔 내심 좀 쫄았었다. 그런데 눈이 마주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누그러지는 눈매하며 씨익 올라가는 입매가 너무도 고와서-내가 말하고도 노인네 같은 표현이지만 정말 곱다는 표현 외엔 잘 모르겠다-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 냉한 얼굴로 맹한 말을 술술 하는 것에 또 놀랐다. 그런데 한동안 옆에서 관찰한 결과, 제 맘에 든 인간들에 한해서인 걸 알았을 때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어디 내놔도 한 눈에 들어오는 외모와 알 수 없는 행동의 갭으로 내 눈을 사로잡은 선배는 곧 툴툴거려도 주변을 잘 챙기는 다정하게 구는 선배로 정의되긴 했지만, 지금까지도 선배는 여러모로 미지의 영역을 가지고 있었다.

 

 


  '카와니시, 나 너 좋아하는 것 같아.'

  '......?'

  '아 좋아한다고. 말귀를 못 알아들어.'

  '감사...합니다?'

  '병신같이 굴지 좀 마. 난 너 그럴 때 정 떨어지더라.'


  아직도 그의 바람 빠지는 것 같이 말하던 짜증이 조금 배인 목소리와 나를 모로 올려다보던-노려보던-눈빛이 잊어지지 않았다. 특히 '병신같이 굴지 좀 마'라고 세상 가장 한심하다는 듯이 선배가 싸늘하게 쳐다볼 때는, 티는 안 냈지만 거의 울 뻔 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좀 억울한 것 같기도 했다. 아니, 나 좋아한다면서? 그때 입 밖으로 흘려버릴 뻔 했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선배 나 좋아한다고 말했잖아요!

 

 

  좋아한다는 거치곤 말도 안 되는 태도로 날 대하는 선배이지만 선배가 날 좋아한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 건 알고 있었다. 입이 걸걸하다는 크나큰 단점이 있을지언정 내가 여태 친하게 지내며 따랐던 선배는 남에게 감정을 가지고 장난칠 위인은 아니었다. 인간적으로 선배를 굉장히 좋아하고 있었던 나였기에 그것만큼은 장담할 수 있었다. 세미선배의 날 좋아한다는 말에 의심은 하지 않았다. 다만 이따금 벌레 보듯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나 한 번 손이라도 스칠라치면 소스라치며 텐도 상이나 우시지마 상에게로 도망쳐버리는 건, 고시키에게 덤덤충이라고 불리는-물론 그 자식이 만취했을 때 딱 한 번 몰래 중얼거린 말이었다-내게도 상처인 일이었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사랑받는 동시에 상처받고 있던 내가 무엇보다도 날 향한 선배의 마음을 더욱 확신할 때는 역시, 내게 애인이 있는 순간이었다.

 

  나와 그녀가 연인이 되기 직전에 한참 연락에 불타올라 폰 액정이 거의 닳도록 메시지건 전화건 몇 분 간격으로 이어가는 걸 보는 선배의 곁눈질. 아니면 캠퍼스를 거닐며 자연스럽게 내 허리에 손을 감는 그녀와 그녀의 어깨를 감싼 나를 발견한 선배의 입이 삐죽이는 그 순간. 아니면 술자리에서 그녀의 전화 때문에 잠깐 자리를 비웠다 돌아온 새 내 옆으로 자리를 바꾼 선배가 급하게 내 옷깃을 잡아채며 앉힐 때의 온기. 아니면 항상 영문도 모르고 차여서 며칠 간 잠수 타는 이별주간이면 어김없이 다정하게 '타이치'라고 불러주는 선배의…… 어딘가 젖은 듯,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

 

  우습게도 나는 그녀들의 살랑거리는 머리카락이나 닿는 부드러운 살결, 좋은 냄새 혹은 그 어떤 스킨십보다도 선배의 행동, 눈빛, 말 한 마디에서 나에대한 무한한 애정을 더 느꼈 그것을 매우 좋아했다.



  텐도 사토리 타이치 군

  텐도 사토리 : 차였다며

  텐도 사토리 : ~? 

  텐도 사토리 : 위로파티 하자

  텐도 사토리 : 위로파티!

 

   갑작스럽게 웅웅 울어대는 폰 때문에 나는 누워있던 몸을 굴려서 엎드린 후, 텐도 상의 메시지를 뚫어져라 봤다. 메시지는 금세 상단바에서 사라졌다. 위로파티는 무슨. 그냥 텐도 상이 마시고 싶은 것뿐이면서. 그리고 거의 한 달에 한 번 꼴로 위로파티를 해야 하는 현 상황이 우스웠다. 선배도 나도 텐도 상도 다들 바보다.

 

  시라부 켄지로 : 대출했음 이제 빌어도 다신 없음

 

  아 그건 아니지. 켄지로의 저다운 간결한 메시지가 뜨자마자 지체하지 않고 답장을 보냈다. '엉 고마워 다음에도 해줄 거 알고 있음'이라고 칼 같은 속도로 답장을 보내자 켄지로에게선 세 번째 손가락만 들고 있는 이모티콘이 날아왔다. 꼭 지 같은 걸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마찬가지로 이모티콘을 보내려고 하는데, 순간 전화가 날아 들어와 누군지 확인도 하지 못한 채로 전화를 받아버렸다. 뭐야. 눈을 끔뻑이고 화면을 내려다보니 '텐도 사토리'라고 떠있었다. 에이씨...

 

  - 타이치 군 타이치 군~ 내 메시지는 읽지도 않고 씹으면서 켄지로 군 메시지에는 칼답? 너무한 거 아니야?

  "답장하려고 했어요,"

 

  텐도 상은 늘 그렇듯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우수수 말을 쏟아냈다. 주변이 시끄럽게 웅성거리는 걸 봐선 강의가 끝나자마자 전화건 것이 틀림없었다. 시계를 올려다보며 아무도 곁에 없는데도 나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고 보면 오늘 오전 강의는 드물게도 켄지로와 나, 텐도 상 그리고 선배까지 함께 듣는 교양이었다. 전화하고 있는 텐도 상의 옆에 있는 걸까. 텐도 상의 말에 성의 없이 대답하며 느리게 선배에 대해 생각했다.

 

  - 그렇다고 치지 뭐. 이따 저녁에 쳐들어갈 거야. 위로파티하자! 위로파티! 타이치군 대체 내가 본 것만 해도 차인 여자가 한 트럭…… 에이타! 잠깐!

  "?"

  - 읽씹이 낫다고 내가 말했냐, 안했냐.

 


  선배였다.

 

  했죠, 제 머리를 있는 힘껏 뜯으시면서. 갑작스럽게 날아드는 선배의 목소리에 나는 선배의 물음에 침착하게 대답했다, 속으로만. 아마 지금 선배의 표정은 내 머리를 힘껏 뜯었을 때의 것과 닮아있을 것이다. 세상 가장 억울한 표정. 익숙한 선배의 얼굴을 여상히 그려내며 나는 침묵을 지켰다. 건너편에서도 아무 말이 없기에 끊어졌나 싶었지만 멀게 들리는 소음 때문에 아직 선배가 종료 버튼을 누르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 타이치. 

  "선배."

  - ....

  "이따 봐요."


  나는 선배의 대답을 듣지 않고 얼른 전화를 끊었다. 텐도 상의 말도 안 되는 위로 파티에 긍정하고 말았지만, 어차피 내가 긍정하든 않든 이루어질 모임이었으니 상관없다. 마지막으로 대답한 선배의 짤막한 목소리는 억지로 끌려온 것처럼 느리게 흘러나왔지만, 평소와 다른 부드러움이 있었다. 아마 내가 이별주간이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 나는 누구를 지칭하는지 모를 욕을 속으로 하며 입술을 물었다. 언제나와 다를 바 없는 이별주간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만할 때가 되지 않았나. 까맣게 꺼진 액정 위를 노려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마음 없는 연애와 소모적인 이별주간은 이제 그만 해야겠다 싶은데. 





*  *  *





  이름만 '카와니시 타이치 N번째 차임 기념 위로 파티'일 뿐이지, 늘 같은 멤버의 평범한 술자리였다. 그나마 붙은 술자리의 이름이 짜증날 뿐이었다. 앞에 있는 술잔에 맺힌 물방울을 손가락 끝으로 스윽 쓸어내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저기 테이블을 휘젓고 다니며 누구보다 시끄럽게 떠드는 텐도나 눈만 끔뻑이며 텐도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진지하게 듣고 있는 와카토시나 원래라면 이런 자리, 관심도 없는 것처럼 굴지만 새침한 태도이면서도 와카토시의 옆을 꼭 지키고 앉아있는 시라부, 그나마 이 자리가 위로파티라는 걸 유일하게 인지한 듯 타이치의 눈치를 보며 어설픈-그점이 무척 귀엽다-위로를 건네고 있는 츠토무, 자못 심각한 얼굴로 지난 번 소개팅 이야기를 하고 있는 레온과 하야토. 이런 게 아수라장인가.

 

  나는 잔이 비기가 무섭게 득달같이 잔을 채워 술을 꿀꺽꿀꺽 삼켰다. 그리고 앞에 있는 방울토마토도 전투적으로, 틈틈이 먹었다. 나는 지금 기분이 몹시 더럽다. 그리고 그런 기색은 알게 모르게 티가 났는지,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 점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또 그 점 때문에 더 짜증이 치밀었다.

 

  나와 조금 먼 자리에 앉아있는 타이치가 츠토무의 서툰 위로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따 봐요.'

 

  그렇게 말했으면서. 존나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타이치는 며칠 전에 차인 것이 맞는지, 보송보송한 얼굴이었다. 정말 멀쩡해보였다는 말이다. 쳐진 눈매 속에 날카로운 눈동자도 여전했고 이따금 씨익 말아 올리는 입꼬리도 여전했다. 분명히 말하건대 나는 타이치의 껍데기에 반한 희생양이었다. 저 반질반질한 겉모습에 홀랑 넘어가 정신을 못 차리는 중인 거다. 아니, 사실 아닌 척 애같이 구는 귀여운 면도 좋고 은근히 다정한 면도 있고…. 취한 와중에 지금 하는 것이 생각인지,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냥, 카와니시 타이치가 좋아죽겠다.



  '세미세미. 왜 타이치한테 고백 안 해? 그렇게 좋아 죽으면서.'

 

  텐도는 늘 요점을 푹 찔렀다. 텐도는 물론이거니와 그 누구도 모르지만 사실 나는 이미 타이치에게 고백을 했다. 그것도 아주 비겁한 고백. 좋아하고 있다는 마음은 전하되 날 좋아해달라거나 사귀자거나 하지 않았다. 분위기도 더할 나위 없이 가볍게, 하지만 장난이 아닌 건 분명하게. 은근히 속이 깊은 타이치가 그런 애매한 고백을 차진 않을 거라는 계산 속에 한 것이었다. 물론, 충동적이었고 비겁했지만 어쨌든 고백을 했다. 타이치는 내가 저를 좋아하는 걸 알지만 날 차기엔 애매한 수준의 고백. 아무렇지 않은 척 하니 저도 나를 피하기 민망할 것이고. 정말 약았지... 약았어.


 

  "선배."

  "......?"

  "바람 쐬러가요."

 

  언제 이쪽으로 온 건지 타이치가 어깨를 톡톡 치고 나가자고 하더니 먼저 일어섰다. 나는 뭐에 홀린 듯 허둥지둥 따라나서려다, 급하게 다시 자리로 돌아와 담배와 라이터를 챙겼다. 아직도 타이치와 단 둘이 있으면 긴장이 되서 견딜 수가 없었다.


  타이치는 가게 옆의 골목길에 서 있었다. 가게 불빛을 살짝 비껴난 골목길은 어두컴컴해서 가까이 가기까지 타이치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아,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쟨 잘생긴 게 최고 장점인데. 좀 밝은데 서있질 않고. 속으로 불평하며 타이치의 옆에 섰다. 원래는 타이치를 바라볼 때 조금만 시선을 올리면 됐었는데 이제는 고개를 살짝 올려야 했다. 나도 평균 키는 훌쩍 넘기는데, 타이치는 정말 컸다. 별 다른 말없이 서있는 타이치의 옆모습을 살짝 훔쳐보다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타이치는 아무런 말없이 내가 담배 태우는 것을 묵묵히 내려다봤다. 새삼스럽게 달라붙는 시선에 침이 꿀꺽 넘어갔다.

 

  "선배."

  "으응."

 

  나는 조금 자신 없게 대답했다. 타이치는 언제나 나를 '선배'라고 불렀는데, 나를 그렇게 부르는 것은 타이치 뿐이었다. 후배들은 다들 나를 '세미 상'이라고 불렀는데 꼭 타이치는 불특정한 누군가를 부르는 것처럼 날 '선배'라고 불렀다. 그게 못내 서운해서 괜히 녀석에게 툴툴댄 적도 있었다. 다른 애들한텐 '텐도 상', '우시지마 상' 잘만 하면서. 그렇게 따지만 나도 고시키나 시라부에겐 츠토무’ ‘켄지로라고도 곧잘 부르지만 카와니시는 꼭 카와니시라고 불렀다. 그렇게 평소에는 꿋꿋이 카와니시라고 부르다가, 타이치가 이별주간에 들어서서 기운이 없어지면 기회다 싶어 마음 속으로만 늘 몰래 불러보는 타이치’를 그제서야 불러보는 나도 좀 병신 같긴 했다. 타이치는 운을 띄우고도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설마 이제라도 애매한 고백을 차려는 건가. 절망적인 생각까지 이어질 동안 말이 없었다.


  "선배 나 좋아해요?"

  ", 좋아하는데."

  "근데 왜,"

 

  뻔뻔한 척 대답은 하고 있었지만 속은 점점 새카맣게 타들어갔다. 미쳤어. 이럴 줄 알았으면 따라 나오지 말 걸. 나는 아직 장초 축에 끼는 담배를 비벼 껐다. 지금은 담배도 당기지 않았다. 세상에. 대체 무슨 말이 이어질지 긴장하는 통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사귀자고는 안 해요?"

 

  뭐?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깔끔하게 고백하고 차이라는 건가?


  뜬금 없는 타이치의 말에 어떤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만 깜빡이고 있자, 언제나의 무표정을 한 타이치의 얼굴이 성큼 가까이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한 발짝 뒤로 발을 빼자, 타이치가 한 쪽 팔뚝을 꼭 잡았다. 얇은 옷 너머로 전해지는 타이치의 손의 온도는 뜨거워서 선뜻 뿌리치지 못했다.

 

  "먼저 좋아한다고 고백하시길래, 곧 사귀자고 할 것만 기다렸는데. 이러다간 우리 못 사귀겠어요."

  "타이치?"

  "이제 마음에도 없이 사귀고 차이는 것도 지겨워요. 제대로 연애할래요, 선배랑."

 

  팔뚝을 단단히 잡고 있던 타이치의 뜨거운 손이 천천히 올라와 내 얼굴을 감싸 쥐었다. 여전히 뜨거운 그 온도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 했는데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타이치는 입꼬리를 예쁘게 말아 올렸다. 진 것 같아 울컥하는데도, 타이치가 웃으니 나도 모르게 같이 내 입꼬리도 함께 올라가려고 하는 것이 절로 느껴졌다. , 이러면 안 되는데. 그래도 타이치가 웃는 모습은 너무 예뻤다. 타이치의 얼굴에 반한 희생양에 걸맞게도 타이치가 웃는 얼굴로 내게 무려 연애하자고 하는데 그걸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자, 타이치는 그대로 나를 품에 꼭 안았다. 손만큼이나 따뜻한 품때문에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타이치는 제 쇄골 근처에 얼굴을 묻고 있는 내 뒤통수를 정성스럽게 쓸어내리며 "잘해줄게요, 진짜."라고 다짐하듯이 속삭였다. 


  아, 얘 연애 경험 많은 거 티내는 거 봐. 망했어. 타이치, 난 망했다고. 속으로 울부짖으면서도 그 품을 더 파고 들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짝사랑에 종말이 찾아왔다. 











카와니시 2학년, 세미 3학년의 1학기 중간?쯤




  오늘의 플레이에 대해 변명해봐라, 세미. 

  이게 네가 하는 '배구'라면, 넌 이 팀에 필요 없다. 

  그것도 아니면. 

  그렇게 네 손으로 점수를 따는 게 중요하다면, 스파이커나 블로커로 전향할 테냐? 너라면 스파이커도 괜찮겠지. 



  감독은 세미를 인정했지만 인정하지 않았다. 감독이 세미에게서 인정하는 것은 그의 실력이었고 인정하지 않는 것은 그의 플레이였다. 포지션을 바꾸는 건 어떻겠냐고 묻는 감독은 허투로 말을 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것은 진심이었을 터다. …스파이커 같은 소리하고 있네. 세미는 차마 받아치지 못했던 말을 속으로 웅얼거리는 것으로 마음을 삭히려 애썼다. 강한 스파이크를 치고 싶었지만, 그건 그저 서브 에이스를 얻기 위함이었다. 애초에 세터인 자신은 스파이크를 칠 일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게 옳았다. 그걸 그따위로...... 세미는 손끝으로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것이 여실히 느껴지는 왼쪽 뺨을 쓸어보았다. 귀안이 쩡 울리는 파열음이 아직도 들리는 것만 같았다. 매서운 손길은 몇 번을 당하고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감독님께 대드는 건 무의미해, 에이타. 우린 3학년이잖아.' 몇 번이고 비슷한 말을 했던 하야토의 목소리가 선명했다. 그러나 그 뒤를 따르던 와카토시의 목소리는 더욱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가 같은 코트에 설 수 있는 것도 올해가 마지막이다, 세미.' 



  와카토시. 와카토시...... 세미는 무릎 사이에 고개를 푸욱 숙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뺨이 얼얼하게 아팠다. 






ruins

카와세미 : 카와니시 타이치, 세미 에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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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미는 샤워실로 들어가 차가운 물을 틀어놓고 한참을 맞았다. 기계적으로 머리를 감고 몸을 씻어도 씻겨 내려지지 않는 감정의 찌꺼기들이 온몸에 들러붙어있었다. 이미 몸은 차가운 물 때문에 새빨개져있는데도, 이상하게 속이 홧홧하게 끓어오르는 것은 가라앉지 않았다. 세미는 하염없이 물을 맞으며 주먹을 쥐었다. 병적으로 관리하는 세터의 손톱은 손바닥을 파고들지도 못했다. 그것이 못내 억울해, 세미는 더욱 주먹을 세게 쥐고 물방울이 맺혀 반짝거리는 벽을 가볍게 쿵, 쿵 내려쳤다. 


  "선배."


  이미 모든 부원들이 돌아간 것을 확인하고 샤워실로 들어왔었지만, 갑작스러운 인기척에도 세미는 놀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카와니시 타이치였기 때문이었다. 


  "왜 왔어."


  세미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샤워실을 울리는 물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을 법도 했는데 카와니시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카와니시는 거침없는 걸음으로 샤워실을 가로질러오더니, 세미 앞의 샤워기를 잠갔다. 카와니시는 아직도 주먹을 꼭 쥐고 있는 세미의 손을 힐끗 보다, 세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척 보기에도 세미의 몸은 추위에 질려있었다. "감기 걸려요." 가벼운 잔소리와 함께 세미를 이끌자, 세미는 저항 없이 끌려나왔다. 




  아직 일교차가 커 저녁엔 탈의실도 제법 서늘한 편이었지만 찬물을 들이붓고 있던 샤워실보다는 훨씬 따뜻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의자에 걸터 앉은 세미는 제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탈탈 털고 있는 카와니시를 곁눈질로 올려다보았다. 카와니시는 늘 그랬던 것처럼 담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미는 슬그머니 시선을 내렸다. 카와니시의 바지자락이 조금 젖어있었다. 


  "타이치......" 


  남들 앞에서는 실수로라도 절대 부르지 않는 이름을 부르며 세미는 카와니시의 허리를 꼭 붙들었다. 세미의 머리를 말려주고 있던 타이치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그저 수건을 내려놓고 세미의 뒤통수를 감싸 안아주었다. 티셔츠의 배 언저리가 축축해지는 것 같았지만 아무렴 어떠랴 싶었다. 연상의 연인의 어리광은 흔하지 않은 것이었다. 카와니시는 물기를 머금어 평소와 달리 가라앉아있는 세미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그 동작에 세미는 카와니시의 품을 더욱 세게 파고들었지만, 카와니시는 쓰다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선배. 나는 선배가 미련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응."

  "난 그런 선배의 배구가 좋은걸요."


  "괜찮아요. 괜찮을 거예요, 선배." 


  카와니시는 세미의 정수리에 가볍게 입 맞추며 제 허리에 감겨있는 세미의 팔을 풀고 그 앞의 바닥에 앉았다. 억세게 품을 파고들었던 것에 비해 세미는 순순했다. 세미가 의자에 앉아있었던 탓에 이번에는 카와니시가 세미를 올려다봤다. "타이치..." 세미의 입에서 작게 카와니시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세미의 표정은 뒤죽박죽이었다. 그것은 억울함, 초조함 그럼에도 양보할 수 없는 무언가 때문에 잔뜩 어질러진 것이었다. 카와니시는 자신을 부르는 세미의 목소리도, 뒤죽박죽인 표정도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카와니시가 오른손을 뻗어 반대 쪽에 비해 조금 빨갛게 부어있는 세미의 왼뺨을 쥐자, 세미는 그 손에 푹 기대어왔다. 


  "나 괜찮은 거지."

  "응. 선밴 괜찮아요. 그리고 우리도 괜찮을 거예요."


  카와니시의 젖은 바지 밑단. 

  카와니시의 배 언저리가 젖은 티셔츠. 

  카와니시의…… 젖어 들어가는 오른손. 


  그 모든 것을 꼼꼼히 머릿속에 새기며, 세미는 자신은 괜찮을 거라고 막연히 그렇지만 분명하게 단언할 수 있었다. 









카와니시 1학년 세미 2학년의 카와니시 시점 

과거 날조주의 캐붕주의 




첫사랑 관찰록

카와세미 : 카와니시 타이치, 세미 에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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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와니시 타이치 1학년, 세미 에이타 2학년 봄  



  아직도 선연히 남아있는 그의 첫 인상은 빨강이었다. 


  바닥을 문지르는 여러 개의 운동화 탓에 끼익, 거리는 고무의 마찰소리가 체육관을 온통 채우고 있었다. 카와니시는 입부기간을 조금 넘기고서 입부했었다. 입학 수속이 생각보다 늦어진 탓도 있었고, 그쯤에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이어왔던 배구가 단순한 습관처럼 여겨져 이대로 그만둬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탓도 있었다. 그러나 늘 하교 후 자연스럽게 달리고 공을 만지고 땀 흘리는 것에 익숙해져있던 몸이 근질근질해 결국은 입부신청서를 내게 된 것이었다. 미미하게 코끝을 스치는 에어파스 냄새와 또래 남자아이들의 땀 냄새, 시끄러운 고무 마찰소리,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그저 아우성에 지나지 않는 여러 외침이 섞인 체육관은 중학교 시절의 체육관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어차피 어느 곳이나 비슷한 것이었다. 


  다만 체육관 한 구석에서 감독의 주먹질을 받아내고 있는 학생이 있는 살풍경한 광경은 어느 곳에서나 볼만한 것이 아니었다. 주변의 그 누구도 그들을 말릴 생각도 하지 않는 걸로 봐선 하루이틀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카와니시는 쉴 틈 없이 쏟아지는 주먹질을 아무런 반항 없이 받아내고 있는 이의 얼굴을 보려고 애썼지만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을 뿐더러, "이름이 카와니시라고 했나?"라고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시라토리자와는 에스컬레이터 식 학원이라 적응하기 힘들지?

  네, 뭐. 

  그래도 배구부는 스카우트 받고 온 애들도 많아서 중학부부터 올라온 사람은 적어. 

  네에

  우선 오늘은 견학하는 걸로 할까?

  아뇨. 괜찮습니다. 그냥 바로 입부할게요. 

  그럴래? 그럼 내일 아침 훈련부터 나오는 걸로 전해 놓을게. 여기로 오면 되고, 시간은......


  주장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부주장도 아닌 것 같은 정체모를 선배에게 붙잡혀 들으나 마나한 이야기를 들으며 카와니시는 겉으로는 예의 바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견학은 괜찮다고 했는데도 그 선배는 아직 한창 훈련 중인 체육관으로 돌아가면서 다시 한 번, "견학하고 가!"라고 소리쳤다. 그러니까 됐다니까. 카와니시는 다시 한 번 거절의 말을 꺼내는 것도 이내 귀찮아져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락커룸 역시 체육관과 마찬가지로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곳이었다. 특별히 깨끗하지도 더럽지도 않은, 감독이나 코치에게 혼나지 않을 정도로만 정리되어 있는 것이 그랬다. 락커룸을 빙 둘러본 카와니시가 목을 좌우로 뚝뚝, 꺾고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려고 하던 그 때, 락커룸의 문이 벌컥 열렸다. 


  "...아."


  갑작스러운 문소리에 막 일어나려던 몸을 엉거주춤 다시 움츠린 카와니시가 문 쪽을 바라봤더니 연습복을 입은 채 황망한 얼굴로 서있는 이가 있었다. 문을 연 이 역시 카와니시와 마찬가지로 누가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던 모양인지 딸려오는 당황스럽게 뱉어진 외마디의 끝이 조금 갈라졌다. 


  붉게 부르튼 뺨과 흐트러진 머리카락, 얼마나 세게 깨물고 있었을 지 짐작될 만큼 잔뜩 짓무른 입술 그리고 결정적으로 손등으로 코를 막고 있지만 도리없이 뚝뚝 떨어지는 코피. 


  복잡한 사고를 거치지 않고도 아까 체육관 한 구석에서 감독의 주먹을 받아내고 있던 이가 그일 거라고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카와니시도 그도 한참을 서먹하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시선을 피한 것은 그였다. 고개를 조금 떨구고 아직도 코피가 배어나오는 콧잔등을 한 번 꾹 누른 그는 카와니시의 발치에 시선을 박았다. 


  "……늦게 입부하는 녀석이 하나 있다고 했던 거 같은데. 그거 너?"

  "카와니시 타이치입니다."

  "세미 에이타. 세터, 2학년. 잘 부탁해."


  대답 대신 이름을 말하는 것으로 물음에 긍정하자, 세미는 카와니시의 발치에 있던 시선을 아주 잠깐 카와니시의 얼굴로 옮겼다가 이내 다시 시선을 내렸다. 살짝 숙여진 고개를 따라 자연스럽게 늘어지는 세미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던 카와니시는 속으로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세미, 에이타. 잘 부탁한다는 인사말에도 대답 없는 후배에 내심 당황한 세미는 습관처럼 다시 입술을 한 번 씹었다가 입 안에 퍼지는 비린 철 냄새에 그제야 지금 제 꼴이 어떨지 떠올렸다. 첫 대면부터 피투성이로 잘 부탁한다는 선배에게 후배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세미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난감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선배. 대단한 얼굴을 하고 계시네요."

  "아……. 저, 이건 별로 우리 부에 말도 안 되는 체벌이 있다던가 하는 건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잔뜩 부은 얼굴 근육을 움직여 웃으려 애쓰며 말하는 세미를 카와니시는 빤히 쳐다봤다. 말하면서 입술 상처가 더 벌어지기라도 한 건지 미간을 조금 찌푸리는 세미를 보면서 카와니시는 저 꼴을 하고서 하는 변명이 참 가관이라고 생각했다. 보통 이럴 땐 차라리 후배건 뭐건 무시하지 않나. 아님 건방진 말투가 거슬린다고 한마디 쏘아붙이거나 흘겨보기라도 하든가. 카와니시는 속으로 생각하며 세미처럼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카와니시가 아무 말 없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하니 세미는 상처투성이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안절부절 못하는 세미에게서 배어나온 코피가 바닥에 툭, 툭 흩어진 건 찰나의 순간이었다. 이미 살색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새빨간 피를 잔뜩 묻힌 손등을 넘어, 팔뚝을 타고 떨어진 코피는 한 번 바닥에 떨어지기 시작하자 뚝, 뚝, 뚝... 바닥에 몇 번이고 추락했다. 



  얼굴은 물론이고 귀와 살짝 드러난 목덜미까지 붉히고 어쩔 줄 몰라하는 세미 에이타, 그건 정말, 대단한 모습이었다. 



  그 날 카와니시는 그 붉은 색이 어른거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카와니시 타이치 1학년, 세미 에이타 2학년 가을 



  삑─


  "에이타!!"

  "세미!"


  코트를 가로지르는 호루라기 소리에 다들 당장이라도 움직일 수 있도록 긴장하고 있던 몸에 긴장을 풀며 호루라기 소리와 거의 동시에 여기저기서 세미의 이름을 외쳐댔다. 카와니시는 몸의 긴장을  풀지 않고 곧장 세미에게로 달려갔다.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오른손으로 움켜쥐어진 세미의 왼손의 손가락의 끝에선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별 것도 아닌 연습경기에서 부상을 입다니. 세미의 눈동자는 고통보다는 자존심이 꺾여 부들거리고 있었다. 카와니시는 호루라기 소리가 채 다 끊기기도 전에 당장 세미에게로 달려갔지만 차마 그 손을 잡아주거나 하지도 못한 채, 그저 세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보고 있을 뿐이었다.


  세미 에이타는 자존심이 굉장히 센 세터라고 카와니시는 평가했다. 자존심이 굉장히 센 '사람'이라고 표현하지 않는 이유는 배구가 아닌 일에서 그가 자존심을 세우는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보는 후배에게 감독에게 얻어터진 얼굴을 보인 첫 만남에서조차 자존심을 부리지 않고 후배에게 말을 걸던 이였다. 다만 그가 유일하게 자존심을 세우는 배구에서만큼은 미련하리만치 꺾일 줄을 몰랐다. 


  세미는 시라토리자와 중등부 출신은 아니었지만 현 내에서는 오이카와의 다음으로 꼽히는 세터로, 그 해에 유일하게 시라토리자와 배구부로 스카우트를 받은 세터였다. 세미가 아직 1학년이었을 때, 3학년이 은퇴한 가을부터는 2학년 선배인 세터를 재치고서 세미가 주전 세터가 되었을 때도 이견은 전혀 없었다. 팀 내 제일가는 실력자를 주전에 넣는다는 단순한 명제에 뒷말이 나올 수 없었다. 시라토리자와는 그런 팀이었다. 그렇게 팀 내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있던 세미가 카와니시와의 첫 대면에서부터 감독에게 얻어터지고 있었던 이유는 결국 자존심 때문이었다. 


  오직 강한 배구를 추구하는 시라토리자와는 절대적인 에이스 우시지마 와카토시를 내세운 원톱체제의 플레이를 표방하고 있는데, 세미는 그것을 따르지 않았다. 코트의 지배자 우시지마의 존재를 무시하는 일은 결코 없었지만, 자신이 코트의 지휘자가 되고자 하는 것을 명백히 드러내는 세미 나름의 플레이가 감독의 눈 밖에 난 것 이었다. 물론 세미의 플레이가 어떻든 시라토리자와에 패배는 없었고 감독은 세미의 고집을 꺾지 못했을지언정, 승리를 독식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팀 내 제일가는 실력의 세터를 굳이 주전에서 끌어내릴 이유는 없었다. 다만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엄한-카와니시는 ‘불합리한‘이라고 생각했지만- 체벌이 끊이질 않을 뿐이었다. 


  세미는 언제고 감독이 그를 향해 주먹질, 발길질을 시작하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냈다. 신음 한 번, 울음 한 번 없이 묵묵히 받아냈다. 팀 메이트는 물론이고 코치마저 그 독함에 차마 감독을 한 번 말리지도 못했다. 말리려고 가까이 가려고 치면 세미가 먼저 그 독한 눈을 번뜩이고 바라봤기 때문이다. 고집스러운 자존심은 그렇게 두드려 맞고도 꺾이는 일이 없었다. 



  카와니시는 벤치에 앉은 세미의 앞에 무릎 꿇고 이미 테이핑 위로 핏물이 맺힌 세미의 손끝을 조심스럽게 움켜쥐고 테이핑을 천천히 뜯기 시작했다. 아마도 뼈가 부러진 것 같은 중지와 약지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고 카와니시의 손 안에서 힘없이 늘어졌다. 곧 카와니시의 조심스러운 손길이 세미의 손 끝에 감긴 테이핑을 뜯어내자, 세미는 맨 손과 함께 드러나는 상처의 고통 때문에 그리고 예의 자존심 때문에 습관처럼 입술을 씹었다. 카와니시는 테이핑을 뜯던 것이 끝나고도 세미의 손을 놓지 않았다. 손 위에 덩그러니 놓인 힘 없는 세미의 왼손을 바라보다 눈만 들어 세미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세미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테이핑을 다 뜯고 드러난 상처입은 세미의 맨손은 반 이상의 손톱이 날아간 중지에는 본디 손톱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애꿎은 피만 봉긋 맺혀있었다. 언젠가의 그 날처럼 옅게 풍기는 피 냄새에 카와니시는 세미에게 충동적으로 입 맞추고 싶었다. 그러나 입 맞추고 싶은 것이 맹렬히 흔들리고 있는 세미의 눈동자인지, 빨갛게 부어오르는 세미의 입술인지, 피가 돋아나고 있는 세미의 손끝인지 알 수 없었다. 


  세미를 둘러싸고 선수들은 물론이고 코치와 감독까지 모여 있었다. 곧 타임아웃 시간이 끝나간다. 여태 아무 말도 없던 감독은 세미의 손을 내려다보고 쯧, 하고 큰소리로 혀를 차곤 코치를 불렀다. 감독이 혀를 차는 소리가 방아쇠가 되기라도 한 듯 세미를 둘러싸고 있던 이들이 흩어졌다. 카와니시는 여전히 세미의 손을 그러쥔 채 무릎 꿇고 있었다. 


  "......아파."


  세미가 작게 중얼거렸다. 세미의 코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카와니시에게나 닿을 법한 아주 작은 소리였다. 카와니시는 조심스럽게 세미의 손등을 쓸었다. 


  곧 호루라기 소리가 다시 코트를 갈랐다. 세미의 자리에는 카와니시의 동급생인 시라부가 들어왔다. 


  그날 이후로 카와니시는 세미가 저 자리에 있는 것을 본 일은 없었다. 








  카와니시 타이치 1학년, 세미 에이타 2학년 겨울



  ""수고하셨습니다!""


  채 숨을 다 고르지 못해 헉헉거리는 이들이 반 이상이었지만 어쨌거나 오늘의 훈련은 끝이었다. 카와니시는 길게 숨을 뱉으며 가파르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가슴팍을 잠재우려 애썼다. 그리고 습관처럼 눈으로 세미를 쫓았다. 세미의 손가락 부상이 멀끔히 나은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갔다. 이제는 감독에게 맞아 늘상 달고 있던 자잘한 얼굴의 상처도 없었다. 그저 리시브 연습으로 인한 팔의 옅은 멍만이 일상적으로 자리할 뿐이었다. 카와니시는 틈틈이 세미를 곁눈질로 관찰하며 어정어정 뒷정리를 했다. "와카토시, 텐도랑 먼저 기숙사 올라가." 여기저기 흩어진 배구공을 주워담으며 우시지마에게 말하던 세미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각자의 플레이 스타일을 고집하면서도 이상하게 사이가 좋은 우시지마와 세미는 네트 밖에서는 약속이라도 한 듯 늘 함께였는데, 오늘따라 그를 굳이 먼저 보내는 세미가 무슨 볼일이 있는지 궁금했다. 


  이맘때쯤 카와니시의 꿈에는 코피를 흘리고 있거나, 피가 쏟아지는 손을 부여잡고 있거나, 온 몸에 상처를 달고서 주저앉아있는 세미가 곧잘 나왔고 카와니시는 그 꿈에서 늘 진득하게 세미의 상처를 핥고 끈질기게 세미의 온 몸에 입 맞추고 억지로 세미의 몸을 열어 비집고 들어갔다. 처음 그런 꿈을 꾼 날부터 카와니시는 자연스럽게 받아드렸다, 제 마음이 세미에게로 기울고 있다는 걸. 


  그러니까, 카와니시는 세미를 좋아하고 있었다. 상처투성이인데도 뒷목을 빳빳하게 세우고 고개를 숙일 줄 모르는 세미를. 금단의 사랑을 향해 내달리는 영화 속 주인공들 같은 열렬한 마음인가 하면 그건 아니었다. 그래도 세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온 감각이 세미 쪽으로 잔뜩 곤두서 있었고,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거나 숨이라도 가깝거나 손이라도 스치거나 하는 날에는 하룻밤을 꼬박 새우는, 사랑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열병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카와니시는 세미에 대한 제 감정을 곱씹으며 벌써 한 시간 째 망부석처럼 락커룸 앞에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아니, 망부석보다는 파수꾼의 모양과 같았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던 세미의 울음소리가 안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카와니시는 저가 지키고 있다면 그 소리가 다른 이에게 닿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앞을 지키고 앉아있었다. 세미 에이타가 운다니. 상상 속에서나, 꿈에서 세미를 몰아붙일 때나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감독에게 어떤 손찌검이나 폭언을 당해도, 

  선배나 동급생들은 물론이고 후배들마저 뒤에서 수군거려도, 

  경기 중에 입은 상처로 기다린 것처럼 강판 당하듯 주전 자리를 내어주어도, 

  세미는 제 플레이를 지킬 수 있다면 무연한 얼굴을 했었다. 세상 모든 고난을 떠안은 것처럼 미간을 찌푸리고, 습관처럼 입술을 깨물어도, 바닥에 핏자국을 남길 정도의 물리적 상처를 입어도 눈물을 흘린 일은 없었다. 


  들을 사람 하나 없는데도 꾸역꾸역 억누르는 세미의 울음소리는 잦아들 줄을 몰랐다. 간헐적으로 물건이 쓰러지거나 부딪히는 둔탁한 마찰음도 이어졌다. 



  세미 선배. 

  좋아해요, 당신을. 

  당신의 상처도, 자존심도. 

  눈을 뗄 수 없어요. 선배. 

  좋아해요… 세미 에이타. 



  카와니시는 문을 열고 들어가 세미를 품에 가두고 싶은 충동을 잠재우기 위해 세미가 늘 그러는 것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입안을 스미는 철 냄새는 언젠가 그와 처음 마주한 날처럼 언제까지고 사라질 줄을 몰랐다. 











dal segno
우시세미우시 : 우시지마 와카토시, 세미 에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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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의 훈련은 감독의 사정이었던가, 학교 행사의 문제였던가 하는 이유로-사실 이 부분의 기억은 흐릿했다. 중요하지도 않았으니-자율훈련으로 대체되었다. 몇 없는 사실상 오프에 신이 난 부원들은 체육관 바닥을 부술 듯이 뛰쳐나갔다. 그 가운데 우시지마는 그들의 걸음을 거슬러 당연하다는 듯이 교복을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세미는 찰나의 고민 끝에 자신도 교복을 체육복으로 갈아입었다. 방과 후, 자율훈련, 사실상 오프, 무더위... 그런 단어들을 나열한 고민은 의외로 단순하게 답이 내렸다. 아무리 귀한 오프라도, 좋아하는 사람과 잠시나마 더 함께 있고 싶었던 설익은 마음덕분이었다. 


  천천히 해가 지고 여름 풀벌레가 울었다. 세미는 아무렇게나 쥐고 있던 배구공을 고쳐 쥐었다. 손바닥까지 땀이 차 잡고 있는 공마저 대번에 끈적거리는 느낌이었다. 짧게 숨을 뱉으며 얼굴선을 따라 흐르는 땀방울을 한 손으로 대충 훔치고 공을 바닥에 몇 번 튕겼다. 탕, 탕. 배구공이 체육관 바닥에 부딪히는 규칙적인 소리가 시원했다. 


  "세미. 아직 안 갔었나."


  잠시 로드워크를 하러간다고 했던 우시지마가 어느새 문가에 서서 세미를 불렀다. 풀벌레 소리에 섞인 언제나와 같은 큰 높낮이 없는 그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세미는 대답 대신 몸을 돌려 우시지마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곧 우시지마의 바로 앞에 선 세미는 쥐고 있던 배구공을 바닥에 흘려보냈다. 다소 가까운 거리에 우시지마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나려하자 세미는 급하게 우시지마의 손목을 붙들었다. 


  언제나 닿고 싶었던 왼손. 차마 그의 손을 잡진 못하고 애꿎은 손목을 꾹 눌러 잡는 것이 고작이었다. 처절한 무음의 고백이었다. 





~캐붕파티~




  승리에의 열망. 누구에게도 이기고 싶었기에 누구보다 더 강해지고 싶었던 시라부가 우시지마 와카토시의 플레이를 본 뒤 그것에 지독하게도 매료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시라부는 우시지마의 경기를 보며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절대적인 강함이 사람의 형태로 구현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중학교 3학년, 스포츠 추천 입학은 턱도 없었던 시라토리자와에 들어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그날로부터 단 한 순간도 잊은 적 없는 우시지마의 강렬한 스파크, 자신만만한 눈빛, 고고한 자세를 드디어 같은 네트 안 코트 위에서 조우했을 때의 쾌감은 여태 맛보지 못했던 강렬한 것이었다.


  그렇게 여태 절대적인 강함을 좇아 달려온 시라부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은 어울리지 않게 후배에게 스타팅 자리를 내어준 선배였다. 더구나 우습게도 그는 스타팅의 자리를 빼앗은 후배보다도 뛰어난 실력의 벤치 후보 선배였다.



  세미 에이타. 시라부는 생각만 해도 속이 울렁거리는 이름을 마음 속으로 외었다. 


  시라부는 쭉 뻗은 제 팔의 끝에 있는 배구공을 보는 척 하며 그 너머의 세미를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구령에 맞춰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세미의 등이 앞으로 미끄러지듯 숙여졌다. 하나 둘 셋 넷─ 둘 둘 셋 넷─ 체육관을 울리는 구령소리와 함께 움직이는 세미의 몸을 따라 흔들리는 짧은 머리카락에서 시라부는 좀처럼 눈을 뗄 줄 몰랐다. 시라부는 눈을 감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바보. 멍청이. 머저리. 병신. 배구공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헛돌아 튕겨지듯 놓치고 말았다. 다시 한 번! 하나 둘 셋 넷─ 구령 소리에 마루 위에 통, 통 튀는 배구공 소리가 불순물처럼 끼어들었다.






삼키다

시라세미 : 시라부 켄지로, 세미 에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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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카-토시 군!"

 

  로커를 닫자마자 장난스럽게 우시지마를 부르며 우시지마에게 달려드는 텐도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3학년들이 에워싸고 옷을 갈아입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시라부는 시끌벅적한 그쪽을 슬쩍 보다가 교복 셔츠에 팔을 꿰었다. 연습을 끝내고 샤워를 한 후 교복으로 갈아입을 때면 '아 오늘도 무사히 끝'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세미와 시라부의 사이에는 1년이라는 애매한 터울이 있으니 일과 중에 마주치는 일이라곤 부활동이 다였다. 같은 포지션을 맡고 있었으니 일부러 접점을 만드려고 애쓴다면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시라부는 의식적으로 세미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세미는 특별날 것 없이 보통의 남자 고등학생정도의, 굳이 살가운 성격이 아니었으니 그저 지금 정도의 사이였다. 두 사람은 같은 포지션의 부활동 선후배치고는 남들이 보기엔 담백하다 못해 오히려 서먹할 정도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따금 경기에서나 연습 중에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정말 배구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시라부는 세미에게서 스타팅 멤버 자리를 빼앗고도 넉살좋게 세미에게 달라붙을 만큼 요령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하다못해 자신이 세미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몰랐더라면 혹은 세미를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야 더 나을 수도 있었지만, 시라부는 제 감정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스타팅에 대해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비단 시라부 뿐만이 아니라 우시지마를 비롯한 나머지 1군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거기에는 세미도 포함되어있었다. 언젠가의 연습 중 세미와 시라부를 손짓으로 부른 감독이 "다음 경기부터는 시라부가 정 세터다."라고 말했을 때, 세미는 "알겠습니다."라고 빠르게 긍정했다. 자신은 그저 세미의 말을 이어 "네."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때 세미는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세미의 목소리나 말투는 어떤 의문도 분함도 담지 않았던 것 같았다. 세미는 누가 봐도 역량 있는 세터였다. 현 내에서도 유명한 아오바죠사이의 오이카와나 카라스노의 카게야마처럼 눈에 띄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시라토리자와에 스포츠 추천으로 입학했을 정도로, 누구든 세미의 플레이를 본다면 그를 인정할 것이다. 시라부가 세미의 스타팅 자리를 빼앗은지 벌써 몇 달 째이건만 아직도 뒤에서 수근거리는 목소리를 시라부가 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시라부 선배도 나쁘지 않지만, 역시 주전은 세미 선배여야 하는 거 아니야?" 시라부는 그렇게 저들끼리 수근거리는 후배들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게, 나도 그렇게 생각해. 시라부는 저 역시도 나쁘지 않은 실력이라고 생각하지만 누가 더 실력이 있는지는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위치를 긍정하고 있을까, 세미 선배는. 시라부가 상념에 잠길 때면 늘 떠올리는 것이었지만 세미에게 직접 물어본 일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시라부는 기껏 잘 갠 연습복을 조금 우악스럽게 가방에 쑤셔 넣었다. 


  아─ 그때, 세미 선배는 어떤 표정이었더라….

 


  "시라부 켄지로오구운. 어떻게 생각해?"

  "괜찮은…데요?"

  "뭐야. 안 듣고 있었던 거야?"


  반사적으로 아무렇게나 대답한 시라부의 목소리는 자신감 없이 뒤가 흐렸다. 시라부의 바로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민 텐도가 그런 기색을 놓칠 리 없었다. 텐도는 한껏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시라부의 머리카락을 한줌 죽 잡아당겼다. “아파요!” 시라부가 텐도의 손을 뿌리치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애초에 자기들끼리 하는 이야기였으면서. 이야기의 중심에 세미가 함께 있는 한 시라부는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니 무슨 이야기를 한 건지 제대로 듣고 있었을 리가 없었다. 텐도가 의중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인진 몰라도, 별로 나한테 좋을 얘긴 아닐 텐데. 텐도는 썩 흥미 없어하는 내색의 시라부의 반응은 싹 무시하고 입을 다시 열었다.


  "에이타 군이 말이야, 아 그러니까 세미."

 

  굳이 덧붙여주지 않아도 아는데요. 세미의 이름이 나오자 시라부는 어디 계속해보라는 뜻으로 삐딱하게 눈으로 텐도를 바라봤다. 


  "아까 고백 받았다니까?"


  뭐야, 별 일도 아니잖아. 세미 에이타가 고백 받는 일은 특별히 놀랄 일도 아니었다. 세미는 한 눈에 띄는 미남자였다. 모난 곳 없이 부드럽게 빚어진 얼굴선 안에 담긴 이목구비 역시 단정하게 꼭 알맞게 자리잡고 있었다. 특히 곧게 뻗은 날카로운 눈동자가 휘면서 웃을 때면 주변 여자아이들이 술렁이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외모도 외모였지만, 우시지마와는 다른 의미로 어른스러운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종종 여자애들에게 불려간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시라부가 세미를 피하려고 애쓰고 있었다지만 상대는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피하려는 노력과 어쩔 수 없이 눈으로 쫓고 마는 관심은 상관관계에 놓여있지 않은 것이었다.

 

  "우와. 부럽네요."

  "진짜? 남자였는데도?"

  "야, 하지 마라니까!"

 

  국어책 읽듯이 감탄사를 내뱉었던 시라부는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세상에. 눈을 동그랗게 뜬 시라부나 소리 지르는 세미의 목소리를 싹 무시한 텐도가 웃음기 어린 입을 다시 열었다.


  "세미보다 더 큰 놈이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절절 매면서 말까지 더듬어가며 고백하더라고!"

  "…그것 참, 절경이었겠네요."

  "그렇지? 아, 그래도 누군지는 안 말해줄 거야. 난 평화주의자거든."

 


  "텐도, 그거 평화주의자랑 상관있어?" 쏘아붙이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선창이라 된양 로커룸의 모두가 웃었다. 웃지 않는 것은 곤란한 얼굴을 한 세미와 언제나와 같이 무표정한 우시지마 그리고 시라부뿐이었다.


 


  시라부는 세미가 낯선 사람에게 고백 받는 그 장면을 상상했다. 텐도 선배가 훔쳐봤다면 아마 체육관 뒤편정도였을까. 나무 그늘 아래서 할 말이 뭐냐는 식으로 상대를 올려다봤을 세미 선배의 얼굴까지 어렵지 않게 상상되었다. 평균을 웃도는 신장의 세미 선배보다도 큰 사람이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절경이었을 것이다. 멀대같은 남자 둘이 서서. 떨면서 고백을 했을 그 남자를 보고서, 세미 선배,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놀랐을까. 역겨워했을까. 아니면…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두 사람 사이에 바람이 불고, 그림처럼 웃어줬을까. 모르겠다. 다만 전해보지도 못하고 피어나는 시점에서 단념하기부터 시작한 스스로의 마음이 불쌍했다. 아무리 절절 매면서 꼴사납게 굴었어도 마음을 전해보기라도 한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가 부러웠다.


  "……부럽네요, 정말."


  중얼거리고 시라부는 빠르게 로커룸을 빠져나왔다. 시라부는 웃을 수 없었다. 고백을 들은 세미가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는 고사하고 스스로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   *   *




  시라부는 그날 세미의 꿈을 꿨다. 텐도의 말을 듣고 상상했던 것처럼 체육관 뒤편의 나무 그늘 아래에서 고백을 받고 있는 세미였다. 꿈속에서 세미에게 고백을 하고 있는 사람은 시라부였다. 시라부는 바로 이건 꿈이구나, 알아차렸다. 선배에게… 고백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세미보다 키는 크지 않지만, 텐도가 묘사했던 것처럼 얼굴이 잔뜩 붉어진 자신이 두서없이 말하고 있었다. 꿈인데도 속절 없이 가슴이 쿵쾅거려서, 입술도 바짝 타서, 손끝도 떨려서 모든 감각이 선명했다. 꿈속의 세미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말을 잇지 못하다가 조금 웃으며 "고마워."라고 말했다.

 

  그날 시라부는 꿈속의 웃는 세미의 얼굴로 몽정을 했다. 깨고 나서도 선명한 감각에 결국 시라부는 다시 잠들지 못했다. 밤새도록 이불 속을 뒤척이며 세미의 웃는 얼굴을 되새겼다. 꿈속에서도 손 끝 하나 닿지 못하는 제가 한심했고, 꿈속에서도 웃는 세미를 보며 예쁘다고 생각하고 마는 제가 또 한심했다.




*   *   *




  "켄지로!!!!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냐!"

  "죄송합니다!" 


  쩌렁쩌렁 울리는 감독의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시라부에게 꽂혔다. 퍼뜩 놀란 시라부가 큰 소리로 대답했지만, 감독의 노려보는 눈이 쉽게 부드러워지는 일도, 이미 꽂힌 모두의 시선이 거둬지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젠장. 시라부는 속으로 욕지기를 뱉으며 제 뺨을 양손으로 찰싹 내리쳤다. 감독님의 말마따나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건지…. 배구공이, 에이스가 눈앞에 있는데. 반응하는 팔다리와 눈의 속도, 움직임이 평소 자신답지 않았다. 체육관 마룻바닥에 마찰되는 배구화가 내는 끼익, 끼익 소리가 정신 차리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결국 연습 내내 감독의 매서운 눈길과 질책을 받다가 부활동을 끝낸 시라부는 옷을 갈아입고도 한참을 로커를 연 채 서있었다.


  "시라부."

  "...네?"

  "어디 아프냐?"


  아직껏 로커 문을 붙잡고 선 채 그 안을 들여다보고 있던 시라부가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퍼뜩 놀라 로커를 세게 닫았다. 쾅! 경쾌한 철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라부는 뻣뻣한 몸을 돌렸다. 틀림 없는 세미의 목소리였다.


  시라부에게서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세미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시라부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 이상하게 조용한 것에 위화감을 느껴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바쁘게 눈동자를 굴리는 시라부에게 세미는 “다 갔어. 너 멍하게 있는 동안.”이라고 상황을 알려주었다. 심술궂지도 않았고 의미심장하지도 않은, 별스럽지 않은 투였는데도 시라부는 괜스레 가슴이 쿵쿵 튀었다. 


  정말 로커룸에는 세미와 시라부만이 남아있었다.


  "오늘따라 멍해보여서.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니야?"

  "네, 아니, 아니요."

  "아프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늘 조금 심통 난 표정으로 빠릿빠릿하게 구는 시라부가 오늘따라 정신없이 굴자, 세미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웃음기 어린 세미의 목소리와 표정에 시라부는 눈을 깜빡이며 이게 진짜가 맞는지 확인하려 했다. 아, 진짜 세미 상이 맞는 거 같긴 한데… 그래도 확실히 현실이 더, 좀 더…. 지난 밤 꿈속에서 보었던 세미의 웃음과 비교하는 멍청한 생각을 하며 시라부는 입술을 깨물었다. 세미는 입술이 새하얗게 될 만큼 깨물고 있는 시라부를 보며, 평소 자존심 센 시라부가 놀림 당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빠진 건가 싶어 고개를 돌려주었다. "늦었으니까 얼른 가자. 오늘 문단속 내가 하기로 했으니까." "네…." 먼저 뒤돌아선 세미의 등에 시선이 붙박고 시라부는 힘없이 대답했다. 숙여진 세미의 등이 천천히 곧게 펴졌고, 그 움직임에 세미의 투박한 머리 모양이 아주 조금 흐트러졌고 예정된 순서처럼 가방을 고쳐 멨다. 그리고 가방 끈에 눌려 주름 진 져지를 조금 정리하고 편하게 가방을 고쳐 메는 손에 시선을 빼앗겼다. 코트의 사령관답게 손끝이 단단한 하얀 세미의 손을 붙들고 싶었다. 공중으로 공을 띄우는 저 단단한 손끝에 얼마나 닿아보고 싶었던가. 


  생각이 마구 뒤엉켰다. 선배, 저는...... 세미 상. 



  "선배."

  "응?"


  시라부는 세미를 부르며 그의 소매 자락을 조심스럽게 쥐고 당겼다. 놀라는 기색 하나 없이 뒤도는 세미의 얼굴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무심하게 조금 삐친 머리카락, 날카로운 눈매와 달리 미적지근한 온도의 눈동자, 타고나길 단정하게 타고난 눈썹 뼈, 어른스러운 인상을 더욱 굳혀주는 입술. 세미는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으려 애쓰며 최대한 정성드려 그 얼굴을 눈에 담았다. 


 

  선배, 왜 저를 기다려주신 겁니까?


  그냥 두고 가버렸으면 지금처럼 선밸 붙잡지도 않았을 텐데.


 

  선배, 왜 남자에게 고백 따위 받습니까?


  여자아이에게라면 얼마든지 고백 받아도 괜찮았을 거예요, 저. 이렇게 흔들리지 않았을 건데.



  선배, 어째서… 어째서, 저를 원망 한 번 하질 않아요?


  선배가 절 원망이라도 했으면 몇 번이고 용서를 구하고 구질구질하게 매달려 봤을 텐데. 선배는 상냥한 사람이니까, 날 원망한다는 죄악감을 가졌을 그 틈을 내가 노릴 수도 있는 거였잖아요. 왜 나에게 그런 빌미조차 주지 않아? 전부 당신이 허락해줘야만 가능한 건데.


  선배, 왜 그렇게 아무 뜻 없이도 웃어주는 겁니까?


 

  선배, 선배. 세미 상...


 


  "시라부?"

  "좋아해요, 세미 상."


  시라부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시라부의 고개 짓과 목선을 따라, 실타래 같이 얇디 얇은 시라부의 갈색 머리카락이 바닥으로, 바닥으로 치달았다. 방향 없이 솟구치는 감정을 감추기에 시라부는 아직 어렸다. 아, 젠장. 저질렀네. 시라부는 고개 숙인 채 눈을 질끈 감았다. 경멸하려나. 무시? 시라부의 고개는 다시 올라갈 줄을 몰랐다. '좋아한다.'는 말을 뱉은 순간에서 몇 초 지나지 않았는데 수 시간은 족히 흐른 것처럼 목이 아팠다. 숙인 목이 아픈 것은 머리통에 든 감정이 무거워서인지, 통제할 수 없이 눈가에 차오르는 물기 때문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혹시, 설마. 꿈속의 세미처럼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말을 잇지 못하다가 조금 웃으며 "고마워."라고 말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시라부는 스스로도 어이없으리만치 긍정적인 생각까지 하는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시라부."


  한참 만에 시라부를 부르는 세미의 목소리는 결코 경멸을 담고 있지 않았다. 시라부는 무거운 고개를 들었다. 선배, 좋아해요. 그 순간에도 속으로 몇 번은 외쳤다. 부디 세미의 귓가에도 그 말이 닿을 수 있길 바라며.


  "그렇게 심각하게 장난치면 나, 정말 믿는다?"


  세미는 시라부의 어깨를 주먹으로 가볍게 툭, 치고 "어제 텐도가 한 말때문에 쳐본 장난이야? 재미 없다. 이제 그만 진짜 가자."라고 덧붙이며 먼저 부실을 나갔다. 그렇게 말하는 세미의 웃음은 꿈속의 것과 같았다. 


  그게 아니에요. 세미 선배, 좋아해요.

  선배, 세미 상. 좋아해요. 제가 많이.

  장난이 아니예요….


  시라부는 입술을 깨물었다. 단단히 깨물린 입술에서 속에 넘치는 말이 새어나올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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