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카와니시와의 기억들을 더듬곤 한다. 서로를 안 세월은 10년을 훌쩍 넘기지만 사귀게 된지 햇수로 2년이었다. 그 사이의 공백은 어쩔 수 없이 메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안타까워하는 대신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카와니시와의 기억을 더듬는 습관을 들였다.
처음 만났던 날, 장소는 말할 것도 없이 고교시절의 체육관이었다. 운동화 바닥과 체육관 바닥이 마찰하는 소리가 울리는 그 속에서 카와니시는 신입부원 대열 속에서 비쭉 튀어나와 큰 키를 자랑하고 서있었다. 이미 입학했을 때부터 내 키를 훌쩍 넘기고 있었지만 갓 중학교를 졸업해 아직은 어딘가 앳된 인상을 가지고 있던, 뚱한 얼굴의 카와니시. 남들보다 색소가 한참 옅은 카와니시의 머리카락을 스치던 햇살을 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이 모든 건 그날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레귤러 자리를 후배에게 내주어야 했던 날. 머지않은 일이라는 걸 스스로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마지막으로 부실 정리를 하고 기숙사로 올라가는 어두운 길목을 걸으며 의외로 담담한 스스로에게 도리어 놀라고 있던 차였다. 가로등이 살짝 빗겨난 곳에서 불쑥 튀어나와 내 손을 붙잡는 손이 있었다. 기다랗고 뜨거운 카와니시의 손. 너무 놀란 나머지 순간적으로 아무 소리도 못 내고 눈만 둥그렇게 뜨고 있는데, 별안간 카와니시의 조금 잠긴 목소리에게 "세미 선배."라고 불리자마자, 눈물이 터졌었다. 카와니시는 기다랗고 뜨거운 손으로 날 끌어안고 가볍게 등을 토닥였다. 그랬던 널, 특별하게 생각하게 되는 건 역시 당연한 수순이었다.
내가 졸업하던 날. 그날은 전날부터 심한 감기에 걸려 제정신이 아니었는데도 나는 부모님의 손을 만류하고 마지막으로 교복을 입었다. 열 때문에 잔뜩 흐려진 시선으로 겨우 졸업식을 마치긴 했는데 문제는 배구부 후배들이 준비해준 졸업 축하 파티였다. 사실 아픈 몸을 억지로 이끌고 졸업식까지 온 내 목적은 졸업식보다는 그 축하 파티였으니 문제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어쨌든 정문을 나서면서부터 한껏 신이 난 배구부 부원들의 대열의 맨 뒤에서 누가 봐도 벌겋게 열에 달아오른 내가 느리게 걷고 있자 옆에서 보폭을 맞춰 걷던 카와니시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선배, 데려다줄게요."라고 말하곤 그대로 대열을 이탈해 집 앞까지 배웅했다. 왠지 모를 억울함과 열이 올라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이성 탓에 대문 앞에서 나는 엉엉 울었다. 레귤러 자리를 내줬던 날은 차라리 양반이었다. 그날은 정말, 목 놓아 엉엉 울었으니까. 카와니시는 답지 않게 조금 당황했었다. 목 놓아 울면서 나는 중간, 중간 소리쳤었던 것도 같다. 잘은 기억 안 나지만, 내용은 대충… "난, 오늘이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는데. 날 왜 데려다줘, 네가 뭔데! 내 맘을 알긴 해? 모를 리가 없지, 비겁한 새끼." …뭐 이런 정도였다. 카와니시는 울분을 토하는 나를 보며 단 한마디의 대꾸도 없이 그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도 곧 입술을 깨물었다. 울음을 삼키고서야 꼭 잡고 있던 카와니시의 옷깃을 겨우 놓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정말 그날이 마지막인 줄 알았는데.
보통은 여기까지 회상하고 나면 재미있기도 하고, 쪽팔리기도 하고 복잡한 심경이 된다. 하지만 내가 네게 이별을 고한 이상 이제는 다른 의미로 다시 복잡한 심경이 되고 만다. 이런 널, 이다지도 내가 사랑한 널, 내가 정말.......
어깨 너머의 불행을 위해서
카와세미 : 카와니시 타이치, 세미 에이타
w. cocomero
아, 잠들었다. 문득 잠에서 깨 눈을 깜빡였다. 아직 채 잠이 다 깨지 않아 제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머리를 굴려보려 애썼다. 어, 그러니까…
카와니시에게 헤어지자고 말했고, 격앙된 상태로 말싸움을 조금 하다가... 가게에서 나와서 차에 올라탔는데 카와니시가 날 운전석에서 빼내 억지로 조수석으로 다시 밀어 넣더니 자기가 운전대를 잡았고, 전혀 낯선 길로 들어서는 걸 눈치 챘지만 어디로 가냐고 물어보기엔 어쩐지 자존심이 상해서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결국 고속도로까지 진입하고 점점 올라가는 속도에 조금 겁을 먹었는데.......
익숙한 자리와 자동차 방향제 냄새, 적당히 틀어놓은 히터와 등과 엉덩이를 따뜻하게 해주는 열선 시트, 뒷자리의 창문을 미세하게 열어 답답하지 않게 하는 카와니시의 운전 습관. 그 익숙함에 나도 모르게 어느새 잠이 든 건가? 제정신이 아니네, 세미 에이타. 스스로의 안일함에 개탄하며 마른세수를 하자,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카와니시가 힐끔, 힐끔 내 쪽을 보고 있었다.
"앞이나 봐."
"네."
"앞에 보라니까? 사고 나겠어."
힐끔거리는 시선을 못 견디겠어서, 결국 한마디 하자 카와니시는 눈썹을 찡그렸다. 맘에 안 든다고 시위할 때 하는 얼굴이었다. 부러 더 차가운 투로 말하자 카와니시의 눈썹은 더 찡그려졌다. 몇 년이 지나도 카와니시에게 남아있는 아이 같은 모습을 나는 사랑했다.
"콱 사고라도 났으면 좋겠는데요."
잠깐 입을 다물었다 한다는 말이 가관이었다. 씨발, 아이 같은 모습을 사랑한다는 말은 취소다.
"…당연히 농담이니까 얼굴 좀 펴요."
"너 미쳤어?"
"음. 차라리 미치고 싶긴 해요."
"제발 운전에나 집중해."
카와니시는 제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서야 번듯하게 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받아칠 말이 없어 대화를 끊어버리고 창밖을 응시했다. 차창으로 운전하는 카와니시의 옆모습을 훔쳐보았고 이따금 내 쪽을 향하는 카와니시의 목마른 시선을 끊이지 않았다. 서로를 훔쳐보고. 나는 언젠가의 그날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은 정말 끝이지 않을까 다시 예상해본다. 갓 오전 0시를 지나는 새벽이었다.
* * *
문득 뺨에 닿는 햇빛이 뜨겁다는 생각이 들자, 퍼뜩 눈을 떴다. 맙소사, 또 잠든 건가. 얼른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자 낯선 방안이었다. 커다란 창으로 햇빛이 가득 들어차는 방. 어렵지 않게 호텔이나 모텔 쯤 되는 숙박업소일 것을 눈치 채고 몸을 일으키려 하자, 가슴팍에 올라와있던 타인의 팔이 내 몸을 지그시 눌렀다. 낯선 풍경 속에 단 하나 익숙한, 카와니시의 팔이었다.
괜한 고집을 부리지 않고 순순히 몸을 다시 누이자, 카와니시의 팔이 이번에는 나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나란히 배구를 하던 때보다 더 공 들여 키운 카와니시의 근육은 이길 수 없었다. 아침잠이 많은 카와니시는 좀처럼 눈을 뜰 줄 몰랐다. 카와니시의 팔을 억지로 물리고 일어날 수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들어 카와니시의 얼굴을 살펴보니 밤새 운전을 한 탓인지, 지난 밤 이별선언 탓인지 반듯한 얼굴에 피로가 껴 조금 수척해보였다. 나는 카와니시의 품으로 다시 고개를 숙이며,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카와니시의 가슴팍에 얼굴을 푹 묻었다. 타이치, 나 힘들어.
첫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나는 정말 통감했다. 카와니시의 앞에서 대성통곡한 고교 졸업식 이후의 이야기였다. 카와니시는 강호교의 배구부 주전이자 부주장이었고 게다가 수험생이었다. 물론 이런 이유가 없더라도 의외로 성실한 구석이 있는 카와니시는 바빴을 것이다. 나는 나대로 대학이라는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는 것만으로 벅찼다. 그래도 문득 일상의 틈에서 카와니시가 생각날 때가 있었다. 그것은 외로움이나 그리움 따위를 동반해 한번 찾아올 때면 오래도록 내 곁을 머물렀다.
사이가 좋았던 배구부 부원들끼리의 모임에도 나는 얼굴을 잘 비추지 않았다. 그나마도 카와니시의 불참을 확인하고서야 뒤늦게 합류했다. 첫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날 좇아오는 것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카와니시와 나 사이의 공백이 계속 되던 시간 동안 누군가 다른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 속에서도 늘 귀퉁이를 돌면 한구석에 카와니시가 있었다. 도망친 지 오래인데도 바로 어제처럼 나를 따라왔다. 그리고 어느 날은 떨쳐냈다고 생각했던 카와니시가 예고도 없이 기어코 나를 쫓아오고 말았다. 차가운 입김과 함께 숨을 몰아쉬면서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 카와니시가 내 손을 꼭 잡았을 때, 이제는 잊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뜨거운 카와니시의 손이 너무도 익숙해서 나는 그 손을 뿌리치는 것을 대신해 깍지 껴 고쳐 잡는 수밖엔 없었다.
사랑인지, 외로움인지, 애틋함인지 혹은 미련내지는 후회인지. 그 모든 것을 포함해서 카와니시를 사랑한다. 그 사실만큼은 언제까지고 바뀌지 않을 것이다.
"선배."
한껏 잠긴 목소리가 작게 울렸다. 나는 여전히 카와니시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고 있었다. 내 등허리에 두르고 있던 팔을 들어 천천히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카와니시의 손길이 전에 없이 조심스러웠다.
"헤어질 마음 없어요, 난."
"...."
"선배도 마찬가지잖아요."
"아니야."
"두 번은 없어요, 선배. 더는 안돼요."
카와니시의 잠긴 목소리를 타고 나오는 말은 단호한 내 대답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단조로운 어조였다. 카와니시는 하염없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다 손을 내려 부드럽게 내 뺨을 감쌌다. 그대로 고개를 들어 올리게 만들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맞췄다. 어제부터 하루 종일, 헤어지자는 말만 반복하는 연인에게. 건조한 겨울 날씨 탓에 조금 튼 입술이 닿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어 카와니시를 밀쳤다.
"씻고 올게요."
별 다른 말없이 밀쳐졌던 카와니시는 한숨을 푹 쉬고 일어났다. 카와니시는 고개를 양 옆으로 뚝뚝 꺾으며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티셔츠를 벗어 소파 위에 대충 걸쳤다. 그리곤 욕실 문을 열고 들어서려다가 "아."하고 깨달은 듯한 소리와 함께 우뚝 멈춰 섰다. 일련의 동작을 뚫어져라 보던 나를 한번 힐끗 보더니 소파 테이블 위에 늘어져있는 차 키, 지갑-내 것도 포함이었다-따위를 한 손에 벅차게 쥐더고 다시 욕실로 향했다. 씻으러 간다던 놈이 무슨 해괴한 행동인가 했더니, 욕실 문을 쥔 채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한다는 말이 가관이었다.
"도망칠 생각하지 마요."
* * *
"추워...."
한 겨울의 바닷바람은 겨우 코트자락이나 입고서 견딜 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차를 내리고 난 후로 겨울에 옷을 껴입는 습관을 없앴던 만큼 더더욱 버틸 길이 없었다.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은 채 연신 춥다고 중얼거리고 있는 걸 보고만 있던 카와니시는 주머니 속 손을 빼앗듯 꺼내더니 제 손으로 감쌌다. 매서운 바람 덕에 평소처럼 뜨겁진 않았지만 여전히 따뜻한 카와니시의 손이었다.
"여기가 어디야, 대체."
"그러게요."
아침에 낯선 곳에 눈을 떴을 때나 여태 이곳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마냥 찬바람이나 쐬고 있는 것이 억울해 물었더니 황당한 대답이 돌아왔다. 어딘지도 모르고 이런 곳으로 온 거야? 겨울 바다와 하늘은 더 없이 파랗지만 황량하기 그지없는 이곳은 나에게도 카와니시에게도 어떤 인연도 없는 곳임이 분명했고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알려진 명소도 아니었다. 추운 날씨도 날씨지만 이런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묵묵히 걸음을 옮기고 있는 사람은 우리뿐이었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 개미 한 마리 없는 곳이었다.
"너 정말 왜 이러는데."
"선배야말로 왜 이러는데요."
"말했잖아, 헤어지자고."
"왜요."
어제 저녁부터 내리 고장 난 장난감처럼 헤어지자는 내 말에 마찬가지로 고장 난 장난감처럼 왜냐고만 묻던 카와니시가 다시금 물었다. 왜냐고. 선이 반듯하고 다부진 카와니시의 얼굴을 들여다보다 천천히 그의 손을 놓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온기가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신 없어."
"뭐가요."
"너랑 더 해나갈 자신이 없다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바싹 가린 채 결국 볼썽사납게 소리치고 말았다. 가까이서 들리는 철썩이는 파도소리가 처량하게 울렸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이 삽시간에 느껴졌다. 헤어지자는 말을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려고 했던 이유였는데. 이상하게 카와니시의 앞에서는 눈물샘이 약해졌다. 찬바람에 잔뜩 굳은 손가락 끝에 힘을 줘 얼굴을 더 감싸 쥐었다. 바람소리와 파도소리 때문에 카와니시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대로 손을 떼면, 카와니시는 없는 거 아닐까 생각했지만 당연하게도 그럴 리는 없었다.
"두 번째예요."
"뭐?"
"선배가 도망치는 거요."
"너 아침부터 두 번, 두 번 거리는데 대체 뭐야? 내가 언제 헤어지자고 한 적 있어?"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카와니시의 말에 다행인지 눈물이 쏙 들어갔다. 일부러 짜증스럽게 대꾸하자, 카와니시는 얼굴을 감싸고 있던 내 왼손을 잡아떼더니 다시 손을 붙잡았다. 아직도, 카와니시의 손은 따뜻했다. 기본적으로 약간 뚱하게 무표정한 얼굴인 카와니시였지만 미미한 감정 변화를 읽을 수 있게 된지는 오래되었다. 잠깐 사이에 카와니시는 답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때, 졸업하고 선배 도망쳤잖아요."
"뭐?"
"지난 일이니까 안 짚고 넘어갔지만 도망이었잖아요. 분명히 말하지만 난 도망칠 생각 없어요."
"카와니시, 난,"
"친구들이 하나둘 결혼하니까 불안해요? 아니면 내가 불안하게 만들었어요?"
속내를 속속들이 들켜, 황망하게 얼굴에서 손을 떼자 카와니시가 얼른 마지막 남은 손까지 잡았다. 살이 에이는 것 같던 바닷바람도 잊을 수 있을 만큼의 악력이었다. 두 손을 꽁꽁 붙잡힌 채 카와니시를 노려봤지만 카와니시 역시 시선을 물리지 않았다. 한참을 말 없이 서로를 쏘아보았고 침묵을 깬 것은 카와니시였다.
"당신과 나라고 해서 아니, 그 누구라고 해도 사랑만으로 매일이 행복하진 않아요."
"...."
"그래도 지금 헤어지면, 분명하게 행복은 없어요. 이미 해봤잖아요, 우린. 적어도 난 불행할 거예요. 날 가엾게 여긴다면 선배가 그러면 안 되잖아요. 또 버리면 안 되잖아."
"타이치, 자신이 없어. 네가 옆에 있어도 불안하고 무서워."
실체 없는 사랑만을 가지고 서로를 믿기에 우리 사이의 공백은 무시할 수 없었다. 카와니시를 감싸고 있는 살갗마저 저주스러울 정도로, 그를 가장 가까이에서 만지고 싶었다. 아무리 사랑을 말해도, 아무리 피부를 맞대도, 아무리, 아무리.......
널 가졌는데도 널 가지지 못하는데. 눈 가리고 아웅 하며 어중간한 행복으로 만족할 바에야 나는 차라리 완벽하게 너로 인해 불행한 생애를 원했다.
사랑해, 타이치.
"사랑해요. 그거면 안돼요?"
구름 한 점 없이 맑던 하늘에서 부스러기 같은 눈이 내렸다. 바닷물에 닿자마자 덧없이 사라지는 그것을 보며 나는 타이치의 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