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t you wait no more
카와세미 : 카와니시 타이치, 세미 에이타
w. cocomero
중학교 1학년, 처음으로 사귀게 되었던 그 여자애와의 관계는 금방 실패로 끝났다. 이제 와서는 그 이름도 어슴푸레한데다가 얼굴마저 떠오르지 않았고, 한여름 햇살 아래서 하늘거리던 그녀의 세라복 치맛자락만이 아주 희미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그렇게 첫사랑을 실패하고 곧이어 찾아왔던 두 번째에도 나는 실패했다. 마찬가지로 세 번째도, 네 번째도… 그리고 이제는 몇 번인지도 모를 그녀와도 어제부로 끝났다. 관계의 끝을 맞을 때면 무엇이 문제였는지 시간을 들여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늘 그래왔듯 이번에도 잘 모르겠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살랑거리는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고 거리낌 없이 내 팔뚝에 팔을 감아왔으며, 그때마다 부드러운 살결의 감촉에 딸려오는 그녀들의 좋은 냄새가 나는 좋았다.
세미 에이타 : 어디
세미 에이타 : 설마 대출?
세미 에이타 : 양심 없는 놈
나는 침대에 모로 누워 폰에 눈을 고정한 채로 하릴없이 포털 사이트의 검색어를 순서대로 눌러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상단바에 연속적으로 떴다가 빠르게 사라지는 선배의 메시지는 미리보기로 읽기만 할 뿐, 읽씹도 아닌 안 읽씹을 선사해주었다. 언젠가의 술자리에서 선배가 내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고는 그대로 뽑을 기세로 잡아당기며 '차라리 읽고 씹으라니까?!??'라고 온 가게가 떠나가라 외쳤던, 잔뜩 뭉개진 발음의 격앙된 목소리가 당장이라도 들릴 것처럼 생생했다. 그래도 역시 오늘도 안 읽씹이다.
세미 에이타 : 타이치 괜찮아?
몇 분 동안 별 다른 메시지가 더 안 날아오기에 이제 잠잠하다 싶었더니 다시금 뜨는 메시지는 아니나 다를까 또 선배였다. 안 괜찮을 건 또 뭡니까. 속으로만 대답하며 알림센터에서 메시지 미리보기를 죄다 지웠다. 선배는 이럴 때마다 나를 어김없이 '타이치'라고 불렀다. 선배는 주변 사람들에게 입으로는 툴툴대지만 행동은 알게 모르게 다정한, 세간에서 이르기를 츤데레라고 하는 캐릭터로, 나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기묘한 짓을 일삼는 사람이었다. 츤데레인 선배는 꼭 이럴 때, 그러니까 내가 여자 친구에게 차였을 때 말이다. 이럴 때만큼은 선배는 그 듣기 좋은 목소리로 예쁘게 그 입술을 움직이고 성대를 울려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고 날 위로했다. 나는 이런 건 정말 치사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하릴없이 액정 구석구석을 눌러보고 있던 손을 우뚝 멈추고 눈을 감았다. 잠시 동안 그렇게 가만히 있다가 이불을 끌어다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나서야 다시 눈을 떴다.
세미 에에타는 나보다 한 학년 위의 선배였다. 선배는 입 다물고 가만히 있기만 하면 선이 매우 뚜렷한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사실 처음엔 내심 좀 쫄았었다. 그런데 눈이 마주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누그러지는 눈매하며 씨익 올라가는 입매가 너무도 고와서-내가 말하고도 노인네 같은 표현이지만 정말 곱다는 표현 외엔 잘 모르겠다-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 냉冷한 얼굴로 맹한 말을 술술 하는 것에 또 놀랐다. 그런데 한동안 옆에서 관찰한 결과, 제 맘에 든 인간들에 한해서인 걸 알았을 때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어디 내놔도 한 눈에 들어오는 외모와 알 수 없는 행동의 갭으로 내 눈을 사로잡은 선배는 곧 툴툴거려도 주변을 잘 챙기는 다정하게 구는 선배로 정의되긴 했지만, 지금까지도 선배는 여러모로 미지의 영역을 가지고 있었다.
'카와니시, 나 너 좋아하는 것 같아.'
'......네?'
'아 좋아한다고. 말귀를 못 알아들어.'
'감사...합니다?'
'병신같이 굴지 좀 마. 난 너 그럴 때 정 떨어지더라.'
아직도 그의 바람 빠지는 것 같이 말하던 짜증이 조금 배인 목소리와 나를 모로 올려다보던-노려보던-눈빛이 잊어지지 않았다. 특히 '병신같이 굴지 좀 마'라고 세상 가장 한심하다는 듯이 선배가 싸늘하게 쳐다볼 때는, 티는 안 냈지만 거의 울 뻔 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좀 억울한 것 같기도 했다. 아니, 나 좋아한다면서? 그때 입 밖으로 흘려버릴 뻔 했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선배 나 좋아한다고 말했잖아요!
좋아한다는 거치곤 말도 안 되는 태도로 날 대하는 선배이지만 선배가 날 좋아한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 건 알고 있었다. 입이 걸걸하다는 크나큰 단점이 있을지언정 내가 여태 친하게 지내며 따랐던 선배는 남에게 감정을 가지고 장난칠 위인은 아니었다. 인간적으로 선배를 굉장히 좋아하고 있었던 나였기에 그것만큼은 장담할 수 있었다. 세미선배의 날 좋아한다는 말에 의심은 하지 않았다. 다만 이따금 벌레 보듯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나 한 번 손이라도 스칠라치면 소스라치며 텐도 상이나 우시지마 상에게로 도망쳐버리는 건, 고시키에게 덤덤충이라고 불리는-물론 그 자식이 만취했을 때 딱 한 번 몰래 중얼거린 말이었다-내게도 상처인 일이었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사랑받는 동시에 상처받고 있던 내가 무엇보다도 날 향한 선배의 마음을 더욱 확신할 때는 역시, 내게 애인이 있는 순간이었다.
나와 그녀가 연인이 되기 직전에 한참 연락에 불타올라 폰 액정이 거의 닳도록 메시지건 전화건 몇 분 간격으로 이어가는 걸 보는 선배의 곁눈질. 아니면 캠퍼스를 거닐며 자연스럽게 내 허리에 손을 감는 그녀와 그녀의 어깨를 감싼 나를 발견한 선배의 입이 삐죽이는 그 순간. 아니면 술자리에서 그녀의 전화 때문에 잠깐 자리를 비웠다 돌아온 새 내 옆으로 자리를 바꾼 선배가 급하게 내 옷깃을 잡아채며 앉힐 때의 온기. 아니면 항상 영문도 모르고 차여서 며칠 간 잠수 타는 이별주간이면 어김없이 다정하게 '타이치'라고 불러주는 선배의…… 어딘가 젖은 듯,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
우습게도 나는 그녀들의 살랑거리는 머리카락이나 닿는 부드러운 살결, 좋은 냄새 혹은 그 어떤 스킨십보다도 선배의 행동, 눈빛, 말 한 마디에서 나에대한 무한한 애정을 더 느꼈고 그것을 매우 좋아했다.
텐도 사토리 : 타이치 군~
텐도 사토리 : 차였다며?
텐도 사토리 : 또~?
텐도 사토리 : 위로파티 하자
텐도 사토리 : 위로파티!
갑작스럽게 웅웅 울어대는 폰 때문에 나는 누워있던 몸을 굴려서 엎드린 후, 텐도 상의 메시지를 뚫어져라 봤다. 메시지는 금세 상단바에서 사라졌다. 위로파티는 무슨. 그냥 텐도 상이 마시고 싶은 것뿐이면서. 그리고 거의 한 달에 한 번 꼴로 위로파티를 해야 하는 현 상황이 우스웠다. 선배도 나도 텐도 상도 다들 바보다.
시라부 켄지로 : 대출했음 이제 빌어도 다신 없음
아 그건 아니지. 켄지로의 저다운 간결한 메시지가 뜨자마자 지체하지 않고 답장을 보냈다. '엉 고마워 다음에도 해줄 거 알고 있음'이라고 칼 같은 속도로 답장을 보내자 켄지로에게선 세 번째 손가락만 들고 있는 이모티콘이 날아왔다. 꼭 지 같은 걸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마찬가지로 이모티콘을 보내려고 하는데, 순간 전화가 날아 들어와 누군지 확인도 하지 못한 채로 전화를 받아버렸다. 뭐야. 눈을 끔뻑이고 화면을 내려다보니 '텐도 사토리'라고 떠있었다. 에이씨...
- 타이치 군 타이치 군~ 내 메시지는 읽지도 않고 씹으면서 켄지로 군 메시지에는 칼답? 너무한 거 아니야?
"답장하려고 했어요,"
텐도 상은 늘 그렇듯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우수수 말을 쏟아냈다. 주변이 시끄럽게 웅성거리는 걸 봐선 강의가 끝나자마자 전화건 것이 틀림없었다. 시계를 올려다보며 아무도 곁에 없는데도 나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고 보면 오늘 오전 강의는 드물게도 켄지로와 나, 텐도 상 그리고 선배까지 함께 듣는 교양이었다. 전화하고 있는 텐도 상의 옆에 있는 걸까. 텐도 상의 말에 성의 없이 대답하며 느리게 선배에 대해 생각했다.
- 그렇다고 치지 뭐. 이따 저녁에 쳐들어갈 거야. 위로파티하자! 위로파티! 타이치군 대체 내가 본 것만 해도 차인 여자가 한 트럭…… 에이타! 잠깐!
"네?"
- 읽씹이 낫다고 내가 말했냐, 안했냐.
선배였다.
했죠, 제 머리를 있는 힘껏 뜯으시면서. 갑작스럽게 날아드는 선배의 목소리에 나는 선배의 물음에 침착하게 대답했다, 속으로만. 아마 지금 선배의 표정은 내 머리를 힘껏 뜯었을 때의 것과 닮아있을 것이다. 세상 가장 억울한 표정. 익숙한 선배의 얼굴을 여상히 그려내며 나는 침묵을 지켰다. 건너편에서도 아무 말이 없기에 끊어졌나 싶었지만 멀게 들리는 소음 때문에 아직 선배가 종료 버튼을 누르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 타이치.
"선배."
- ...어.
"이따 봐요."
나는 선배의 대답을 듣지 않고 얼른 전화를 끊었다. 텐도 상의 말도 안 되는 위로 파티에 긍정하고 말았지만, 어차피 내가 긍정하든 않든 이루어질 모임이었으니 상관없다. 마지막으로 대답한 선배의 짤막한 목소리는 억지로 끌려온 것처럼 느리게 흘러나왔지만, 평소와 다른 부드러움이 있었다. 아마 내가 이별주간이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바-보. 나는 누구를 지칭하는지 모를 욕을 속으로 하며 입술을 물었다. 언제나와 다를 바 없는 이별주간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만할 때가 되지 않았나. 까맣게 꺼진 액정 위를 노려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마음 없는 연애와 소모적인 이별주간은 이제 그만 해야겠다 싶은데.
* * *
이름만 '카와니시 타이치 N번째 차임 기념 위로 파티☆'일 뿐이지, 늘 같은 멤버의 평범한 술자리였다. 그나마 붙은 술자리의 이름이 짜증날 뿐이었다. 앞에 있는 술잔에 맺힌 물방울을 손가락 끝으로 스윽 쓸어내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저기 테이블을 휘젓고 다니며 누구보다 시끄럽게 떠드는 텐도나 눈만 끔뻑이며 텐도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진지하게 듣고 있는 와카토시나 원래라면 이런 자리, 관심도 없는 것처럼 굴지만 새침한 태도이면서도 와카토시의 옆을 꼭 지키고 앉아있는 시라부, 그나마 이 자리가 위로파티라는 걸 유일하게 인지한 듯 타이치의 눈치를 보며 어설픈-그점이 무척 귀엽다-위로를 건네고 있는 츠토무, 자못 심각한 얼굴로 지난 번 소개팅 이야기를 하고 있는 레온과 하야토. 이런 게 아수라장인가.
나는 잔이 비기가 무섭게 득달같이 잔을 채워 술을 꿀꺽꿀꺽 삼켰다. 그리고 앞에 있는 방울토마토도 전투적으로, 틈틈이 먹었다. 나는 지금 기분이 몹시 더럽다. 그리고 그런 기색은 알게 모르게 티가 났는지,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 점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또 그 점 때문에 더 짜증이 치밀었다.
나와 조금 먼 자리에 앉아있는 타이치가 츠토무의 서툰 위로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따 봐요.'
그렇게 말했으면서. 존나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타이치는 며칠 전에 차인 것이 맞는지, 보송보송한 얼굴이었다. 정말 멀쩡해보였다는 말이다. 쳐진 눈매 속에 날카로운 눈동자도 여전했고 이따금 씨익 말아 올리는 입꼬리도 여전했다. 분명히 말하건대 나는 타이치의 껍데기에 반한 희생양이었다. 저 반질반질한 겉모습에 홀랑 넘어가 정신을 못 차리는 중인 거다. 아니, 사실 아닌 척 애같이 구는 귀여운 면도 좋고 은근히 다정한 면도 있고…. 취한 와중에 지금 하는 것이 생각인지,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냥, 카와니시 타이치가 좋아죽겠다.
'세미세미. 왜 타이치한테 고백 안 해? 그렇게 좋아 죽으면서.'
텐도는 늘 요점을 푹 찔렀다. 텐도는 물론이거니와 그 누구도 모르지만 사실 나는 이미 타이치에게 고백을 했다. 그것도 아주 비겁한 고백. 좋아하고 있다는 마음은 전하되 날 좋아해달라거나 사귀자거나 하지 않았다. 분위기도 더할 나위 없이 가볍게, 하지만 장난이 아닌 건 분명하게. 은근히 속이 깊은 타이치가 그런 애매한 고백을 차진 않을 거라는 계산 속에 한 것이었다. 물론, 충동적이었고 비겁했지만 어쨌든 고백을 했다. 타이치는 내가 저를 좋아하는 걸 알지만 날 차기엔 애매한 수준의 고백. 아무렇지 않은 척 하니 저도 나를 피하기 민망할 것이고. 정말 약았지... 약았어.
"선배."
"......어?"
"바람 쐬러가요."
언제 이쪽으로 온 건지 타이치가 어깨를 톡톡 치고 나가자고 하더니 먼저 일어섰다. 나는 뭐에 홀린 듯 허둥지둥 따라나서려다, 급하게 다시 자리로 돌아와 담배와 라이터를 챙겼다. 아직도 타이치와 단 둘이 있으면 긴장이 되서 견딜 수가 없었다.
타이치는 가게 옆의 골목길에 서 있었다. 가게 불빛을 살짝 비껴난 골목길은 어두컴컴해서 가까이 가기까지 타이치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아,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쟨 잘생긴 게 최고 장점인데. 좀 밝은데 서있질 않고. 속으로 불평하며 타이치의 옆에 섰다. 원래는 타이치를 바라볼 때 조금만 시선을 올리면 됐었는데 이제는 고개를 살짝 올려야 했다. 나도 평균 키는 훌쩍 넘기는데, 타이치는 정말 컸다. 별 다른 말없이 서있는 타이치의 옆모습을 살짝 훔쳐보다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타이치는 아무런 말없이 내가 담배 태우는 것을 묵묵히 내려다봤다. 새삼스럽게 달라붙는 시선에 침이 꿀꺽 넘어갔다.
"선배."
"으응."
나는 조금 자신 없게 대답했다. 타이치는 언제나 나를 '선배'라고 불렀는데, 나를 그렇게 부르는 것은 타이치 뿐이었다. 후배들은 다들 나를 '세미 상'이라고 불렀는데 꼭 타이치는 불특정한 누군가를 부르는 것처럼 날 '선배'라고 불렀다. 그게 못내 서운해서 괜히 녀석에게 툴툴댄 적도 있었다. 다른 애들한텐 '텐도 상', '우시지마 상' 잘만 하면서. 그렇게 따지만 나도 고시키나 시라부에겐 ‘츠토무’ ‘켄지로’라고도 곧잘 부르지만 카와니시는 꼭 카와니시라고 불렀다. 그렇게 평소에는 꿋꿋이 카와니시라고 부르다가, 타이치가 이별주간에 들어서서 기운이 없어지면 기회다 싶어 마음 속으로만 늘 몰래 불러보는 ‘타이치’를 그제서야 불러보는 나도 좀 병신 같긴 했다. 타이치는 운을 띄우고도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설마 이제라도 애매한 고백을 차려는 건가. 절망적인 생각까지 이어질 동안 말이 없었다.
"선배 나 좋아해요?"
"어, 좋아하는데."
"근데 왜,"
뻔뻔한 척 대답은 하고 있었지만 속은 점점 새카맣게 타들어갔다. 미쳤어. 이럴 줄 알았으면 따라 나오지 말 걸. 나는 아직 장초 축에 끼는 담배를 비벼 껐다. 지금은 담배도 당기지 않았다. 세상에. 대체 무슨 말이 이어질지 긴장하는 통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사귀자고는 안 해요?"
뭐?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깔끔하게 고백하고 차이라는 건가?
뜬금 없는 타이치의 말에 어떤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만 깜빡이고 있자, 언제나의 무표정을 한 타이치의 얼굴이 성큼 가까이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한 발짝 뒤로 발을 빼자, 타이치가 한 쪽 팔뚝을 꼭 잡았다. 얇은 옷 너머로 전해지는 타이치의 손의 온도는 뜨거워서 선뜻 뿌리치지 못했다.
"먼저 좋아한다고 고백하시길래, 곧 사귀자고 할 것만 기다렸는데. 이러다간 우리 못 사귀겠어요."
"타이치?"
"이제 마음에도 없이 사귀고 차이는 것도 지겨워요. 제대로 연애할래요, 선배랑."
팔뚝을 단단히 잡고 있던 타이치의 뜨거운 손이 천천히 올라와 내 얼굴을 감싸 쥐었다. 여전히 뜨거운 그 온도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 했는데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타이치는 입꼬리를 예쁘게 말아 올렸다. 진 것 같아 울컥하는데도, 타이치가 웃으니 나도 모르게 같이 내 입꼬리도 함께 올라가려고 하는 것이 절로 느껴졌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그래도 타이치가 웃는 모습은 너무 예뻤다. 타이치의 얼굴에 반한 희생양에 걸맞게도 타이치가 웃는 얼굴로 내게 무려 연애하자고 하는데 그걸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자, 타이치는 그대로 나를 품에 꼭 안았다. 손만큼이나 따뜻한 품때문에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타이치는 제 쇄골 근처에 얼굴을 묻고 있는 내 뒤통수를 정성스럽게 쓸어내리며 "잘해줄게요, 진짜."라고 다짐하듯이 속삭였다.
아, 얘 연애 경험 많은 거 티내는 거 봐. 망했어. 타이치, 난 망했다고. 속으로 울부짖으면서도 그 품을 더 파고 들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짝사랑에 종말이 찾아왔다.